“이민사회서 통일과 민주화 운동 외로웠다” |
보스톤코리아 2016-02-29, 12:00:46 |
(보스톤 = 보스톤코리아) 장명술 기자 = 앤도버에 거주하는 박기식 선생이 올해 88세 미수와 결혼 60주년을 맞아 3월 6일 앤도버 소재 북부보스톤 감리교회에서 조지아대 박한식 석좌교수와 함성국 목사를 초청해 강연회를 갖는다. 박 교수는 <신앙과 평화문제>를 주제로, 함목사는 <민족문제와 성경의 분부>를 주제로 각각 강연하게 된다. 강연은 오후 5시부터 시작한다. 강연 후에는 음악공연과 친교의 시간이 마련된다. 박한식 교수는 박기식 선생의 국민학교 제자였다. 박기식 선생은 보스톤 한인사회 원로 중에서는 드물게 통일 문제와 민주화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가졌던 사람 중의 하나다. 1972년 로렌스에 정착했던 박선생은 1973년 하버드에서 열렸던 김대중 구명집회에 참석했었다. 당시 구명집회를 주도했던 인물들은 그레고리 핸더슨 플레츠 스쿨 학장, 제롬 고헨 그리고 일본 황실의 귀족이었던 에드윈 다이샤와 등의 인물이었다. 박기식 선생은 자신이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를 담당하는 1인이었을 수도 있었다고 술회했다. 비록 미국에 와서 임창영, 선우학원 씨등과 만나면서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에 몰입했지만 한국에서는 중앙정보부 언론대책관이었었다. 당시 언론인이었던 이민우 전 동양통신 기자는 언론 통제를 담당했던 박기식 선생을 생생히 기억했었다. 5.16 쿠테타의 주역이 대구 출신이었기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미군을 제대한 TK인맥이었던 박기식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다. 김대중 납치 사건 때의 행동책이 김기환이었는데 그는 주한 대사를 지냈던 성김 대사의 아버지다. 김기환과 친분이 있어 일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정보부장이 허락하지 않아 결국 한국에 남게 됐다. 그때 그를 따라갔었으면 납치사건에 십중팔구 연루됐었을 것이란다. 박기식 선생은 중앙정보부 언론 통제관으로서의 삶에 대해 “소위 본성에서 출발한 삶이 아니었다. 인격을 팔아먹는 일이었다. 구걸하다시피 기자들에게 메달리게 됐다.”며 결국 자신을 위해 정보부를 그만 두게 되었다고 밝혔다. 미국에서 삶은 철저한 소시민이 되자라는 생각에 청소부에서 시작했다. 이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공부하고 웨스턴 일렉트릭에서 근무하고 은퇴했다. 그는 늘 아끼는 것을 생활화 했다. 술과 담배를 일절 안하는 그는 골프, 게임 등도 일체 삼갔다. 통일과 민주화 운동으로 많은 한인들과 다른 삶을 영위했던 그는 “눈 뜨고 비벼봐도 대화를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외로웠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박 선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평가도 돌다보면 이상한 말로 귀착되곤 했었단다. 그가 지금껏 “이민생활을 굳건히 지켜왔던 것은 그나마 신앙생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수 잔치에 초청된 그의 과거 제자 박한식 교수의 강연 <평화와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박기식 선생의 삶을 반영한다. 강연회가 마련된 박 선생의 미수잔치는 지금껏 그 외로웠던 자신의 길을 재확인하고 격려하는 시간으로 해석된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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