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80 |
보스톤코리아 2015-05-11, 11:38:41 |
누구나 일생을 통하여 많은 업적과 에피소드를 남긴다. 문제는 그 업적이 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가에 따라 이른바 ‘유명인’과 ‘장삼이사’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살아온 생은 한 마디로 요약되어 객관적으로 평가된다는 무서운 현실… 최홍희는 군軍 장성과 태권도(본인은 자신이 태권도의 창시자 또는 아버지라 칭했다. 하지만 그는 태권도의 창시자가 아니고 ‘태권도’의 작명자이다), 그리고 인생의 후반에서 사상과 이념적으로 전향 등이다. 후반의 전향관계로 인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군 경력과 태권도 통하여 쌓은 국제적인 업적을 기술/언급하는 것이 금기시 되다시피 하였는데, 그의 사후 조금씩 그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회에 이어서 그의 군경력과 군에서의 태권도를 통하여 자신의 정치세력 구축화116) 와 망명 후 전향하여 태권도를 공산국가를 비롯하여 전 세계로 전파한 과정을 살펴 본다. 육군 제 29사단장 최홍희는 제주도에서 강원도로 이동한다. 보병 제29사단이 강원도의 1군단(현재는 경기도에 있다)으로 배속되면서 이동한 그는 우리나라 태권도 5대 문파에 이어 6번째로 오도관吾道館을 창설했다. 이에 앞서 해방 후 2단이었던 그는 1955년 청도관의 손덕성관장으로부터 명예4단 단증을 받았다. 오도관의 창설은 최홍희와 남태희의 합작품이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이원국의 청도관에 입문하여 당수도를 배운 뒤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제29사단장 최홍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부관이 되어 손덕성, 현종명, 백준기, 한차교, 우종린, 고재천 등 대부분 청도관 출신들과 함께 강원도 용대리에서 오도관을 창설하였다. 이 오도관은 최홍희가 후일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기구인 ‘국제태권도연맹(ITF, 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54년의 시범, 이승만대통령이 관람하는 제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 행사(제29 사단의 창설 1주년 합동 기념행사)의 하나로 펼쳐진 당수도 시범이 ‘태권도’라는 용어, 그 고유명사를 탄생하게 만들었으며(태권도와 김치는 우리 고유의 것인가? 2~4편 참고), 최홍희의 군내의 입지 또한 태권도를 통하여 격상되었다. 117) 이 시범 후 최홍희는 밟을 태跆, 주먹 권拳으로(이승만 대통령이 시범 당시 “저게 태껸이야 태껸!” 했던 한 마디 때문에 최홍희는 그와 비슷한 음절을 고르기 위해 고심하였다)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 오도관과 청도관에 먼저 공수도(가라데) 대신 사용하였고, 그리고 이듬해 1955년4월11일 명칭제정위원회118) 에서 당수나 공수 등의 왜색 이름을 버리고 우리나라 고유의 명칭을 사용하자고 합의한 후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까지 받았다. 물론 이 당시만 해도 섬나라에서 유입한 무술의 변증법적 발전과 ‘태껸’을 위주로 한 우리이 고유무술과의 융합을 통하여 오키나와의 ‘당수’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키나와 당수는 1922년 일본 본토로 상륙하여 ‘공수’라는 이름으로 변하였고, 해방을 전후하여 우리니라에 들어온 당수/공수는 1955년 ‘태권도’라는 새이름의 옷을 갈아 입었다. 그 후에도 초창기 5대 문파의 실리와 명분에 얽힌 자존심으로 ‘태수도’ 등의 이름으로 미아처럼 헤메다가 1965년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태권도’ 개명한 후 이 무도의 이름은 변하지 않고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가장 많은 수련생을 보유하고 있다. 116) 최홍희는 자서전 ‘태권도와 나’ 에서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떳떳이 두 개의 이름을 댄다. 하나는 부모가 준 최홍희요, 다른 하나는 태권도라고 말할 정도로 태권도는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민족무도인’임을 자처했다. 태권도 보급과 전파를 위해서는 지구촌 어디라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가겠다고 하였으며, 조국관을 질문 받았을 때는 그는 내 조국은 남도 북도 아닌 통일된 조국이 내 조국이라고 답변했다. 117) 김용옥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 제 16가름의 ‘跆拳발생의 近因: 최홍희의 알랑방귀’에 당시 상황을 잘 묘사했으며, “최홍희는 우연히 앙랑방귀 하나 뀌는 과정에서 한국근대문명의 거대한 서브컬쳐를 지배하는 개념의 한 힛트를 휘날렸던 것이다.”라고 추가하였다. 철학자 김용옥의 영어 표현인 Subculture는 그 사건의 의미를 ‘新문화’ 로 정의하는지 아니면 다른 뉘앙스(下位 문화, 反문화, 異문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118) 사실 명칭은 최홍희가 남태희의 도움으로 이미 제정되어 있었고 단지, 거국적인 공신력을 얻기 위하여 제정위원회를 만들어 그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게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태권도와 김치는 우리 고유의 것인가? 4편’ 을 참고하길 바란다.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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