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족과 신라, 가야의 친연성 (3)
보스톤코리아  2014-12-08, 12:16:08 
금령총 발굴 기마 인물상. 안장과 말등자.
금령총 발굴 기마 인물상. 안장과 말등자.
서기 375년 이후 100여년간 전유럽 대륙을 석권한 훈족의 원류에 대해서는 동양학자는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원래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 사람들이 훈족을 비하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흉노의 원래 이름은 “훈”이었던 것이다. 

유럽을 침공한 훈족과 흉노의 원래 이름이 “훈”이라는 것을 내세워 흉노와 훈이 동족이라는 것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프랑스 동양학자 드 기뉴(De Guigenes)였다. 

드 기뉴는 1756년에 “훈통사”를 저술했는데 중국과 서양의 기록을 합쳐서 흉노가 망한 다음에 AD 375년에 훈족이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수백년 동안의 흉노 역사의 공백을 채워 나갔다. 사실은 드 기뉴가 동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같다. 흉노는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다.

BC 127년 한무제 때 곽거병, 위청 장군에게 김일제의 부왕 휴저왕이 패전한 뒤로도 흉노는 여전히 존재해서 부침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 훈족이 유럽에 나타났던 4세기 말에도 중국 대륙은 5호 16국이(304~439) 난립하고 있었는데 흉노, 선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잔들. 유럽과 신라 사이에 인적 왕래가 있었다는 증거.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잔들. 유럽과 신라 사이에 인적 왕래가 있었다는 증거.
 
하지만 그가 주장하고 있던 흉노와 훈이 동족이라는 주장은 많은 호응을 받고 있었다. 일본 동경 대학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훈족의 세력권이었던 볼가강 유역에서 판노니아(헝가리) 평원에 걸쳐 출토되는 흉노식 유물을 증거삼아 흉노와 훈족이 동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에가미 교수가 주장하는 훈족 영역에서 발견되는 대표적 흉노 유물은 흉노식 동복이었다.

동복은 스키타이 식과 흉노(훈) 식 두 종류가 있다. 스키타이 식은 반구형의 몸체와 작은 돌기가 있는 고리 모양의 두 귀를 가지고 있고 굽다리 형식인데, 흉노 식은 사발모양 몸체와 여러 장식이 있는 ㄷ 자형 손잡이를 가지고 있다. 

금관가야 왕족들의 무덤인 김해 대성동 29호와 47호에서 출토된 동복과 김해 양동리 235호분에서 나온 동복은 흉노(훈) 식이다. 

경주 금령총을 발굴할 때 점토로 만든 기마 인물상(국보 91호)이 출토되었는데, 말 등에 동복이 실려 있었다. 반구형의 몸체와 굽다리 형식으로 미루어 스키타이 식 동복이다. 

김해에서 발견된 3개의 동복과 기마 인물상 말 등에 실려 있는 동복으로 인해 훈족의 원류가 한반도 남단의 신라, 가야라는 주장이 대두되게 되었다.

근래에 독일 국영 ZDF TV 방송국이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의 “잃어버린 고리 찾기” 프로그램에서 AD 375년 전유럽을 삽시간에 유린하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에 위치한 한반도 한민족일지 모른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편집자 옌스 페터 베렌트와 코넬 대학과 베를린 공과 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트 박사는 훈족의 원류로 한반도 최남단의 신라와 가야를 지목했다. 

ZDF TV다큐 중에 그들이 주장한 바는 “비밀스런 아시아의 초기 역사에서 훈족의 실제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세인의 주목을 끈 고고학적 발굴물이 그들의 원래 고향이 아시아 대륙의 최동단일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고구려 무용총의 배사 장면
고구려 무용총의 배사 장면
 
한국의 작은 도시 경주 근교의 묘(금령총)에서 부장품으로 점토상이 발굴되었다. 말을 탄 사람 뒤에 흔치 않게 생긴 솥이 실려 있는 기마상, 이 솥은 똑바로 세워 말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형태의 그릇(동북)은 지금까지 이곳(신라, 가야 지역)과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 복장이고 안장과 발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훈족의 아틸라 왕(AD 434~AD 453)이 기마병을 이끌고 유럽 대륙을 석권할 당시에 로마 기마병들은 훈족이 사용하고 있던 말 안장과 말등자가 없었다. 

말 등에 담요 한장을 두르고 그 위에 앉아서 말을 몰고 전투를 하였다. 말등자가 없었던 로마군 기병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한손으로는 고삐를 단단히 쥐고 한손으로만 칼, 창을 휘두를 수 있었다. 수많은 로마 군인들이 말에서 떨어져 죽은 이유는 말 안장과 말등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훈족 기병들은 말등자에 두 발을 디딜 수 있어서 안정된 자세를 취할 수 있었고, 두 손을 다 사용해 칼, 창, 활을 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망가면서도 뒤로 몸을 돌려 활을 쏠 수 있었다. 

로마 기병뿐 아니라 중국도 진나라 때까지 말등자가 없었다고 한다. 중국이 한 무제 이전까지는 한번도 흉노와 싸워 이긴 적이 없는 이유는 말등자 한 가지 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신라, 가야가 훈족의 원류가 될 수 있는 3가지 이유를 추가하였다. 

첫째는 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이 몽골리안 반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신라, 가야 사람들처럼 훈족은 편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복합궁을 한민족과 훈족이 모두 사용했다는 점이다. 

그외의 증거로는 순장(殉葬) 풍습과 장례절차가 양쪽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훈족의 왕 아틸라가 사망하고 난 다음에 치른 그의 장례절차가 한민족의 장례절차와 아주 비슷하다. 

그가 사망한 지 3일, 5일, 49일이 되는 날 고인의 말을 도살하여 문상객들이 나눠 먹었는데, 우리 장례는 3일째 매장하고 5일째 삼오제를 치르고 49일째 49제를 치른다. 

장례와 묘제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는 법이다. 그리고는 또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된다. 한민족과 훈족의 장례절차가 유사한 것은 두민족 간에 조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몽골 반점은 검은 피부를 가진 종족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아시아인, 인도인, 아프리카인들에게 나타난다. 백인들 중 10% 정도는 몽골 반점을 가지고 태어날 수 있다.
 
프랑스 살롱 지역과 샤토 지방,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비롯해서 헝가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아이들에게 몽골 반점이 많이 생기는 이유는 훈족이 유럽에 진출해서 남긴 징표가 틀림 없다. 물론 게르만 민족들도 몽골반점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4세기 말에 게르만은 훈족에게 정복 당하고 쫒겨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분명한 실체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이며 그들이 남긴 여러 유물과 신라, 가야의 유물을 비교하면 훈족과 한민족 지배 집단 사이의 친연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한민족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그들이 원하는대로 우리 역사의 부침을 바라보고만 있을 한민족이 아니었다.

언젠가 세계 역사의 간두에서 한세대를 관장했던 우리의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주에는 훈족과 신라, 가야가 공유하고 있는 순장 풍습, 편두 풍습과 복합궁 활에 대한 이야기로 계속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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