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정책과 조선총독의 고려대장경 간행 (5) |
보스톤코리아 2014-11-03, 17:41:46 |
2014-08-08 일본이 1932년에 중국의 영토를 빼앗아 만주국을 세우자 중국의 항의와 열강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첫째로 남의 나라 영토를 탈취하여 따로 나라를 세우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둘째는 주권국인 중국의 반대와 항쟁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다. 셋째는 일본의 침략 전쟁을 반대하며 만주국을 승인치 않는다는 국제연맹의 결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다. 그런데 1932년 1월 18일 일본의 일련종(日蓮宗)의 탁발승 하나가 상해거리에서 중국인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상해의 일본해군은 탁발승의 살해가 중국의 반일단체의 소행이라고 지목 하면서 육전대를 동원하여 학생단체와 노동자 단체를 습격했다. 상해부근을 수비하던 중국의 제19로군이 상해 육전대에 대항해서 반격을 가하면서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의 상해 육전대가 중국의 제19로군을 당하지 못하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상해의 일본해군은 본국에 원병을 청했다. 일본이 열강의 관심을 만주로부터 딴곳으로 돌리기 위해 상해사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일본군부는 즉시 가나자와(金澤 ) 제9사단과 구루메(久留米) 제24사단 그리고 노무라 요시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이 이끄는 제3함대를 상해로 파견하고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측義則) 대장을 상해 파견군의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총 공격에 나서게 했다. 중국의 제19로군은 일본군의 중무기와 그 화력을 당하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를 제1차 상해사변이라고 한다.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일본군이 침략 전쟁을 도발하자 영•미•불등 열강의 항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은 즉시 전투를 중단하고 정전을 선언했다. 일본 외무성은 상해사변을 변명하여 정치적인 야심은 전혀 없으며 인본의 이권과 일본인의 안전을 위하여 취한 자위적 행동이라고 공표했다. 후에 밝혀진 사실로 상해사변의 발단이 된 일련종(日蓮宗)의 탁발승의 살해는 상해 주재 일본공사관의 무관인 다나가류기찌 보좌관이 관동군의 요청을 받고 중국인을 매수하여 상해거리를 돌아다니며 통냥하는 일본의 일련종 탁발승을 살해한 것이란다. 이사건은 전적으로 일본군부의 계획적인 모략이었던 것이다 일본군부는 육군과 해군 그리고 외무성이 공동으로 “만주의 독립과 지나(중국)문제의 처리요강(要綱)”을 작성하여 그 시행을 관동군 참모인 “ 이다가기 세이시로” 대좌에게 훈령했던 것이다. 관동군 참모부는 일본군부의 훈령을 받아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일본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일본의 이권과 일본인의 안전을 위하여 관동 “군이 독자적으로 행한 군사행동이었다”고 변명하지만 그 모두가 일본군부가 계획한 “만주독립과 중국문제처리요강”에 따라 행해진 군사행동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말이다. 상해사변을 전후하여 북지(北支)는 이미 일본세력이 판을 치고 있었다. 상해사변이 있은지 두달 후인 1932년 4월29일이었다. 이날은 일본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이다. 이날 상해의 일본거류단이 천장절의 경축과 함께 상해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는 경축식을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개최하였다. 4월을 마지막 보낸 초여름이라 날씨가 좋아 많은 인파가 공원으로 몰려왔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렸던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상해임시 정부의 김구선생이 건네주는 수제폭탄을 받아가지고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나눈 다음 홍구공원으로 달려갔다. 윤봉길의사는 일본인을 상대로하는 세탁소의 외교원이었으므로 일본말에 능통했다. 그는 일본사람으로 변장하고 경비가 삼엄한 경축식장으로 의젓이 걸어들어갔다. 경축식이 시작되었다. 유봉길은 재빨리 단상 앞으로 뛰어나가 단상의 귀빈석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그순간 폭발하여 단상에 앉은 일본장성들이 모두 나가쓰러졌다.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은 중상을 입고 1개월후에 사망했다. 그리고 주중대사 시케미쯔 마고도(重光葵)는 한쪽다리가 날아갔으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요시사브로(野村吉三郞) 중장, 가나자와 제9 사단장 우에다 켄기찌( 植田謙吉) 중장 등 10여명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상해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던 홍구공원의 경축식장은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상해파견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요시노리대장과 그 휘하의 사단장들이 모두 나가 떨어진 것이다. 얼마나 장하고 통쾌한 일이였던가. 7만중국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24세의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가 혼자서 때려 눕인 것이다. (다음에 계속)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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