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얘기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나누고 주고받으며 사는 일이 쉬운듯싶으나 때로는 그 관계라는 것이 어찌 그리도 어려운지 모른다. 물론, 사람의 성격에 따라 조금은 다를 수 있으나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의 모습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다. 서로 부족한 모습으로 있는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고 안아주며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하고 풍성한 삶이면 좋겠다. 요즘처럼 내가 중심인 이기적인 삶에서 먼저 다가가 말 한마디 건넬 수 있고 악수 한 번 먼저 청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면 좋겠다.
때로는 사랑받아야 할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나 자식과 형제·자매 그리고 친지와 친구로부터 외면 당했을 때의 그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그 벌어진 상황에서의 입장이 피해자가 되었든 가해자가 되었든 간에 두 사람 모두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며 치유하기 어려운 깊은 상처가 되는 것이다. 상처라는 것 또한 상대성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기준을 준다든가 받는다는 그 표현 자체도 조금은 깔끔하지 않은 말이 아니던가.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듯이 팔 안의 어느 각도에서 어느 만큼을 재느냐에 따라 결과는 판이해지지 않던가.
세상에 살면서 우리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객관적인 잣대(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마음의 눈으로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여유의 삶이길 소망한다. 설령, 가족의 일이라 할지라도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더욱 복잡하고 뒤엉킨 풀기 어려운 실타래로 만들지 않는 힘을 기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어떤 일에 대해 상대의 말을 들어볼 여유도 없이 울컥하며 올라오는 그 화를 다스리지 못해 폭발해버리는 어리석음을 가끔 경험하지 않던가. 때로는 자신의 그 화기를 식히지 못해 더욱 화가 나는 일 말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잠시 한 발짝 뒤로 머물러 서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의 힘이 바로 지혜인 까닭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사고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다면 삶은 어쩌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삶의 귀퉁이에서 가끔 만나는 일이지만,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 남의 일에 유난히 궁금증으로 사는 이들도 더러 있다. 우리네 삶에서 그것이 정이라고 말하면 정일 것이고 상대에 대한 관심이라고 하면 또 관심일 것이다. 그것에 대해 옮다 그르다는 답도 없을뿐더러 서로의 관계의 폭과 갈피만큼인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서로의 관계에서 허용한 범위 내에서라면 말이다.
삶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친정 집에 가면 친정 오빠나 남동생의 아내인 올케에게 시집 가족이 되어 '시누이'라는 명찰을 달고 당당한 모습으로 있다. 시댁에서는 남편의 누나나 여동생인 시누이의 '올케'가 되어 무엇인가 불편함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가족들이 여럿 모인 모임에서 늘 이런 모습들을 객관적인 눈으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참으로 웃음이 날 때가 더러 있다. 그저 '나는 나일 뿐' 달라지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의 표정과 행동으로 있지 않던가 말이다. 어느 장소의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에 따라 딸과 며느리의 입장과 역할은 달라진다.
이렇듯 삶은 어찌 보면 연극 무대의 배우의 모습임을 새삼 또 깨닫는다. 어느 역할이 내게 주어진 것이냐에 따라 그 맡은 역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가 배우로서의 자격과 실력이라고 평하지 않겠는가. 좋은 역만 맡으면 착한 사람으로 있을 수 있을 텐데, 늘 배우의 역할은 바뀌기 마련인 까닭에 악역을 맡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누구의 잣대로 어느 방향과 어느 각도에서 재어지느냐에 따라 선하고 악함의 자리에 서기도 한다. 삶은 이렇듯 '판단'이라는 어리석은 '개인의 잣대'를 제멋대로 사용해서 곁의 많은 이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어제와 내일 사이 오늘을 산다. 삶은, 늘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고마움과 아쉬움 사이에서 행복과 후회의 교차로에 서 있다. 이렇게 했더라면 저렇게 했더라면 하는 그런 아쉬움 내지는 후회랄까. 지천명(知天命)에 오른 나이 이제는 후회보다는 감사의 시간이 더 많기를 마음의 기도로 남긴다. 쉼 없이 달려오고 달려가는 숨 가쁜 우리네 삶의 현실 속에서 이제는 누군가의 아늑한 나무가 되어 기다리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이의 나무 그늘에서 쉼을 얻고 싶어진다. 인생 여정에서 서로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다면 더 없을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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