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랬던 것처럼 산을 오르며 인생을 생각한다. 계절마다 만나는 자연은 일상처럼 맞이하는 대수롭지 않았던 오늘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어 신비로운 오늘을 만끽하라고 일러준다. 높은 가을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파란 하늘을 향해 까치발을 들고 한쪽 팔을 높이 치켜들어 곧추세운 손가락 끝으로 누르면 금방이라도 파란 물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만 같다. 가을의 풍경은 이처럼 시인이 아니더라도 화가가 아니더라도 마음 안에 고요를 흔들어 깨운다. 볼을 스치는 가을바람과 눈을 감기게 하는 가을 햇살과 가을빛에 타드는 오색단풍이 그렇다.
자연은 언제나처럼 말 없음으로 말을 건네온다. 깊이 잠자던 오감을 일깨워 잠든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가을은 여름내 분주하던 발걸음을 세워 잠시 쉼을 가지라고 일러준다. 가만히 눈감고 깊은 호흡으로 저 바람을 내음을 맘껏 만나고 느끼고 누려보라고 그렇게 일러주는 것이다. 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저 너른 들녘의 누런 곡식들의 흔들림을 보라. 그 속에는 농부들의 피땀 흘린 정성의 손길과 숨결이 그대로 살아 흐른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그 어느 것 하나도 혼자일 수 없음을 알기에 창조주에 대한 감사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어우러져 호흡하며 춤추고 노래하는 축제의 계절이다.
높이 솟은 가을 산은 산봉우리마다 각각 제 색깔의 옷을 갈아입고 깊은 골마다 솔기를 이룬 계곡은 마치 여인네의 열두 폭 치맛자락처럼 곱고 아름답다. 때로는 바라보기조차 너무 아름다워 차마 서글퍼지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높고 넓고 큰 창조주의 손길에 너무도 작은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감사의 시간인 까닭이다. 가을 산을 오르며 여느 때보다도 자연을 보며 더욱 마음이 숙연해지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견뎌냈을 그 모진 시간 때문이다. 긴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으며 꽃을 피우고 작렬하는 뙤약볕의 여름을 견뎌내고 가을을 맞으며 열매를 맺는 생명들의 안간힘을 안 까닭이다.
오색 빛깔의 가을 단풍을 보며 곱고 예쁘고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가을 나뭇잎에 하나둘 단풍 물이 들기 시작하는데 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파져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 때가 불혹(不惑)의 언덕을 막 올랐을 나이였는데 이제는 그 세월의 시간을 넘어 지천명(知天命)의 언덕에 올랐으니 언 10년이 훌쩍 지난 얘기이다. 몸에 문신을 하려면 자신의 살갗을 긁어내야 물감이 드는 것처럼 가을 나뭇잎에 단풍 물이 들기 위해서는 제 몸인 이파리의 살갗을 긁어내는 아픔과 처절한 고통과 상처가 있어야 함을 몸소 느낀 까닭이다.
가을 나뭇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리고 제 무게만큼만 흔들리다 땅에 떨어지기까지는 긴 기다림의 시간과 아픔과 고통의 견딤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뭇잎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그때에 잎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잎의 세포마다 이어진 줄기와 가지와 나무 그리고 땅속 깊이 박힌 뿌리와 그 뿌리에 이어진 실가지까지도 함께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처럼 홀로일 수 없는 함께 공생 공존하며 상생하는 생명의 귀함 앞에 그저 숙연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처럼 자연은 말 없음으로 찾아와 가슴을 훑고 지나는데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러쿵저러쿵 구시렁구시렁하는 것은 아닌지.
이처럼 자연을 보면서 깊은 묵상에 머문다. 특별히 가을에 만나는 자연은 더욱 깊은 의미를 담은 하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물먹은 초록의 이파리들 여름 햇볕에 반짝일 때는 이 가을에 어떤 색깔과 빛깔의 단풍 물을 들이려는지 알기나 했을까. 이렇게 긴 기다림과 견딤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제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지 않던가 말이다. 참으로 솔직하지 않던가. 우리네 인생도 어쩌면 이렇게 각자의 색깔과 빛깔을 찾으려 오늘도 자신의 맡겨진 환경과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제 색깔을 찾아 인생의 가을을 맞을 때쯤에는 맑고 투명한 빛을 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을 산을 오르며 언제나처럼 인생을 생각한다. 여기저기 울긋불긋 제 색깔로 단풍 물든 가을 산도 아름답지만, 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환한 웃음과 밝은 표정과 그리고 오색찬란한 옷차림이 더욱 눈길을 끈다. 이렇게 가을 산은 우리에게 일상에서의 소중한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긴 기다림과 견딤의 세월 속 인생의 깊음에 대해 깨닫게 해준다. 산을 오르내리며 깊은 산 속 나무들 틈에서 보지 못했던 숲의 아름다움을 이제는 멀리 서서 먼 그림으로 여유를 가지고 그 산속 깊은 아름다운 숲을 바라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가을 산을 오르며 사람과 삶을 그리고 인생을 생각한다.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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