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작은 편이라 늘 높은 신발을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멋 내기 좋아하고 개성이 강한 편이라 누군가 내 차림새 모양을 흉내라도 낼라치면 괜스레 짜증 내 하던 그런 아이였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세상 나이 오십인 지천명(知天命)에 오른 나이에도 여전하다. 때로는 쉰 살 아줌마의 나이와 몸은 생각지도 못하고 짧은 청치마에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저기 활보하는 것이다. 그 배짱이야말로 오십에 든 아줌마의 두툼한 '똥배짱'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편이나 세 아이가 그다지 잔소리는 하지 않으니 제멋에 겨워 살기로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인의 초대를 받아 갈 일이 있으면 신발 벗고 들어가는 것이 괜스레 불편할 때가 있었다. 그것은 집에서 늘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습관이 첫 번째 이유일 테지만, 무엇보다도 높은 신발에 긴 바지 차림이 신발을 벗는 순간 모양새가 없어지는 이유인 것이다. 요즘도 그때의 어린아이 같은 철없던 생각을 가끔 해보면 웃음이 스쳐 지난다. 정말 그런 때가 있었는데 싶어서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 멋 내기를 중단했다는 것은 아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과 정신이 더욱 맑아지고 밝아지기에 게을리하지 말고 깔끔함과 단정함에 더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폼생폼사'라는 재미 있는 말이 있듯이 반평생을 그렇게 멋 내기에 길들여져 살아온 내게 3년 전부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스톤산악회 회원이 되어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내 인생의 아주 특별한 변화의 선물이었다. 그것은 그 어떤 변화를 위한 시작이 아니었기에 더욱 감사하고 귀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산에 오르고 싶었던 첫 번째 이유는 자연을 좋아하니 자연과 함께할 수 있음이었고 두 번째가 몸의 건강을 위해서 선택했던 결정이었다. 그런데 산을 오르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산과 마주하면 할수록 오르면 오를수록 함께하는 시간만큼 내게 걸쳐진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벗겨주는 것이다. 늘릴 수 없는 작은 키를 커 보이고 싶어 높은 신발만 신던 나는 산을 오르며 어쩔 수 없이 낮은 등산화를 신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어떤 하나는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속 울림이었다. 물론, 높은 신발을 신고도 산을 오를 수 있었다면 이렇듯 큰 변화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산을 선택한 내게 특별한 변화의 선물이란 바로 더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손에 있는 것을 놓아야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남편과 남편 친구들과 마주 앉아 먹는 것 좋아하고 즐기니 다이어트에 성공하기란 영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에게나 그 옛날에 '금송아지' 한 마리쯤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게도 그 금송아지 하나 꺼내보라면 무엇보다 그 옛날 내게도 날씬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첫아이를 낳고 한국미 쌀 한 포의 무게 40 파운드(18kg)가 늘었다가 산을 오르며 10파운드가 준 것이다. 그 옛날의 금송아지 얘기를 하면 그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만 빛바랜 사진 몇 장이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주는 듯 있으니 그나마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몸소 산을 오르며 경험하는 것은 너무도 많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내 속의 깊은 생각과 나를 만나게 한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니 잃고 살았던 작은 것들까지도 섬세하게 꺼내어 버릴 것은 버리게 하고 남길 것은 남길 수 있는 맑은 정신을 선물해 준다. 세상과 마주하며 겪었던 기쁨과 행복과 아픔과 상처 그 모든 것들을 속에 담아두지 말라고 산은 내게 일러주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거든 감추지 말고 밖으로 내어놓으라고 그렇게 타일러 준다. 눈에 보이는 작은 키를 감추려고 애쓰지 말고 마음의 작은 키를 키우려 애쓰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에서 머물며 시간 낭비하지 말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세상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맘껏 훨훨 날개짓하며 날아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하늘이 주신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색깔과 모양과 소리로 남 눈치 살피지 말고 맘껏 즐겁게 살라는 것이다. 산을 오르며 더욱 깊은 내 속의 나를 만난다. 이렇듯 자연은 나를 나로 살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혼자 살 수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언제나 자신의 삶의 선택은 자신인 까닭이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더욱 솔직해지라고 산은 내게 진실함을 일깨워준다.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