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규장각 도서의 수난
보스톤코리아  2013-08-05, 13:16:46 
1951년  여름이다. 차순영은 부산에서 신혼생활에 들어갔고 서울에서 내려온 몇 친구는 아는 이들을 찾아 다 떠났다. 나는 별로 갈 데도 없고 또 이조 실록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경남도청내 무기고에서 숙직을 하면서 지냈다.

때는 여름이라 춥지가 않아서 그런대로 지낼 만 했다. 마침 미군이 사용하다 버린 침대가 하나 있어서 그것을 펴 놓고 침대겸 의자를 대신했다. 무기고는 벽돌집 단층건물이지만 큰 창고 같아서 실록을 보관하고도 여유가 있어서 지내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서울대박물관 촉탁인 이종새노인이 갈데가 없어서 나와 같이 무기고에 와 계셨다. 무기고에는 사무용 책상과 의자 하나가 비치되어 있어서 서울대도서관의 임시 사무실과도 같았다. 그래서 갈데가 없는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어느날이다. 경남도청에서 화재가 염려된다면서 무기고에 있는 사람을 모두 나가라는 퇴거 명령이 내려왔다. 어디로 가야하나. 돈이 있어야 집을 얻지 않겠는가. 세를 놓는다는 집도 없다. 도대체 남아도는 집이 없다.

피난민의 종착지는 부산이다. 부산은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콩나물시루와도 같았다. 피난민들은 개천가이든 산중턱이든, 공유지나 사유지를 불문하고  집을 지었다. 

무허가라는 말은 그 당시에 있지도 않았다.  살만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천막을 치고 또 토굴을 타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 1951년 당시의 인구통계가 없어서 확실한 수는 없지만 피난민을 합하면 부산 인구는 일천만이 훨씬 넘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행히 영도 산 밑에 있는 초가집의 안방하나를 세 얻어 자취하기로 했다.  동회에서 피난민에게 배급하는 쌀과 간장 등을 받아다가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밥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보름이 안돼서 한 가마니 반이나 되던 쌀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모두들 궁하던 때라 그 쌀이 남아 있을리가 없었다.

부산에 가지고 내려온 규장각도서는 관재청 창고와 경남도청의 무기고에 잘 보관되어 있어서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일을 찾아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래서 찾은 일이 가정교사였다. 영도에 사는 데구리배(고기잡이) 주인집 아들(부소고 학생)의 가정교사였다. 그런데 사례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저녁식사 대접하는 것으로 대봉치려 하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내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영도에는 해녀가 많이 살았다. 주인 아주머니 소개로 노인 해녀 한 분을 알게 되어 우리들은 가끔 해녀들이 물일을 하려고 떠나는 대열의 뒤에 따라 아미동을 넘어 해변가로 가서 무더운 여름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호규가 와서 알려주기를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모집하고 있으니 가 보라고 하면서 주소를 주기에 그 주소를 들고 부산역 건너편에 있는 노무자 사무실로 갔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그 자리에서 간단한 필기와 구술시험을 받았다. 이튿날부터 출근하라고 하면서 일할 장소와 교통편을 알려주는 것이다. 아침 6시 30분까지  부산역 앞에서 미군트럭 GMC를 타고 아가사까에 있는 미군부대로 가는 것이다.


백린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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