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분주한 발걸음으로 걸어왔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몸은 많이 바빴지만, 나 자신을 찾는 시작점이 되었고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펼친 보람된 삶의 시기였다. 문득, 지천명의 오십에 올라 불혹인 사십 대의 나의 지난 십 년 동안의 삶을 하나씩 정리해 보고 있다. 인생의 제일 중요한 시점인 사십 대를 나는 진정 후회 없이 잘 살았는가 나 자신에게 또 물어보면서 말이다. 30대에는 올망졸망 연년생인 세 아이 키우느라 나의 자리를 찾을 겨를도 없었다. 어찌 보면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과 세 아이 그리고 곁의 많은 시댁 가족들과의 삶에서 부딪치는 여러 모양과 색깔과 소리의 틈새에 낀 내 인생의 한 단편.
내가 선택한 길이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시점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죽도록 사랑하고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둘만의 세상일 거라고 믿었던 철없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현실을 즉시 할 때마다 더 크게 내게 다가왔다. 그렇다, 결혼은 둘만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 후 나의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삶은 가정을 이루고 남편과 세 아이를 키우며 제일 행복했던 때였음은 분명한데 또한,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기에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도 많다.
늦은 막내로 자라 여느 형제들보다 제 멋대로인 성격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자리했던 모양이다. 이 넓은 미국 땅에 나는 혼자인데 주변의 시댁 가족들의 숫자는 내가 서 있는 중심에서 360도 한 바퀴를 돌아도 여전히 시댁 식구의 모습이었다. 좁은 한인사회의 그 어디에 가도 늘 시댁 가족들과 마주해야 했던 자유롭지 못한 나 자신에 그만 답답함으로 견디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나의 삶이 버겁던 그 시기에는 그 누구의 칭찬이나 관심마저도 불편한 간섭으로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시댁 가족들과 먹거리 쇼핑을 가거나 그 외의 다른 쇼핑을 갈 때도 우르르 함께 다니는 것이 내겐 곤혹스런 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성격에 친정아버지께도 하고 싶은 의견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내어놓곤 했었다. 결혼 후 시댁에서의 모습은 아내인 시어머님이 남편인 시아버님께 당신의 의견 하나 제대로 내어놓지 못하고 사시는 것이 아니던가. 자식들도 생각보다 아빠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그뿐이었을까. 시어머님의 동생인 시이모님들까지도 형부라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며 숨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 한국의 시어머님의 친정어머님이신 시 외할머니께서 미국 큰딸네 집에 놀러오셨는데 장모님이신 외할머님마저 맏사위인 시아버님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나의 존재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라는 존재에 대해 드러내기보다는 숨어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막내아들이었지만, 결혼 후 2년 6개월을 시댁에서 살았다. 시아버님께 며느리인 내 의견을 내어놓을 수 없으니 시댁 가족들과 만나면 점점 말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시아버님과는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해야 옳을 일이다. 시어머님을 곁에서 뵈면서 안쓰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남편(시아버님)에게 당신의 의견을 제대로 내어놓지 못하는 모습에 안쓰러움보다 내 마음에 화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로 내 속의 화병이 되어 답답함에 견딜 수 없는 가슴으로 병이 되고 말았다.
결혼 생활 10년까지 그렇게 나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내어놓지 못하고 살았다. 내 속이 답답할 때마다 화풀이하는 곳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고, 아이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속이 다 풀어진 것은 더욱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나의 존재감에 대한 혼돈의 시기였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한 가정의 며느리와 한 남자의 아내 그리고 세 아이의 엄마 그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진정한 나를 찾으려 발버둥을 치길 얼마였는지 모른다. 속으로 삭이려 무던히도 애쓰던 때 내색하지 않으려 미친 듯이 아이들 학교 보내고 쇼핑을 다니고 밤새도록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를 달랬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택했던 나의 결혼생활과 현실 그 안팎에서의 갈등 그리고 내 깊은 내면에서의 나 자신과의 싸움과 갈등 그리고 화해로 뒤엉킨 혼돈의 시간이었다. 나의 30대는 20대에 다 펼치지 못하고 접어야 했던 나의 꿈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속상하고 억울한 생각과 현실이 뒤범벅되어 그렇게 흘러갔다. 혼돈의 30대를 보내고 불혹인 사십을 맞으며 조금씩 나 자신을 챙기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40대는 남편과 세 아이를 키우며 몸은 바빴지만, 뫔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기에 내 인생의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고 그 꿈을 이루며 행복한 삶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십을 맞았다.
시인 신영은 월간[문학21]로 등단, 한국[전통문화/전통춤]알림이 역할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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