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사에 감사하라! - 추수감사주일을 맞으며 - |
보스톤코리아 2006-11-22, 00:36:14 |
조태연 목사 (보스톤중앙교회)
고대 그리스 철학자였던 플라톤(427-347 BCE)은 하나님께 세 가지를 감사하였다. 첫째는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고, 둘째는 야만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철학자인 것이었다. 주어진 조건에 만족하던 철인(哲人)의 감사는 그로부터 한 세기 후 동양에서도 메아리쳤다. 맹자도 그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만족과 감사의 마음을 품었던 것이다. 첫째, 맹자는 부모와 함께 있고 형제가 있으니 감사했다. 둘째,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땅을 내려다 봐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감사했다. 셋째, 맹자는 천하의 영재들을 한 집에 모아 가르칠 수 있으니 감사했다. 이같이 감사하는 마음이 맹자를 천하의 성인으로 만들었다. 어느 날 태산(泰山)을 유람하던 공자는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개씨로 만든 띠를 졸라 맨 채 거문고를 타면서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름이 영계기라 하였다. 공자가 물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는 까닭이 무엇이오?” 영계기가 답하였다. “내가 즐거워하는 까닭은 참으로 많소. 하늘이 만물을 낼 때에 모든 것들 중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내었는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첫째가는 즐거움이요, 또 사람이 태어나면서 빛나는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미 90세나 되니 그 또한 큰 즐거움이요, 가난하게 사는 것은 도(道)를 닦는 이에게 당연한 일인데 내 가난함이 또한 큰 즐거움이요, 죽음이란 산 사람에게 당연한 종말인데 이제 내가 당연한 일에 처하여 살다가 제 명(命)에 죽게 될 터이니 그 또한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오?” 공자가 말하였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오. 선생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실 수 있는 분이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옛 성현들은 한결같이 지금 자신이 살아있음을 감사하였고, 지금 자기에게 허락된 일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한 마디로, 생(生)과 실존(實存)에 대한 다함이 없는 긍정이며 어떠한 형태든 삶의 조건에 대한 무한한 만족의 발로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정기를 받았을까? 맹자와 영계기의 지혜를 터득했을까? 동서(東西)의 중간(다소: Tarsus)에 살다가 서방의 그리스에 들어간 바울은 아테네와 고린도에 차례로 머물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거기서 이르기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살전 5:18). 하물며, 생명을 죽음으로 바꾸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누린 그 극적인 은혜와 축복이라면 어떠할까? 첫 번째 감사절(맥추절 또는 칠칠절)의 제정은 이런 마음으로부터 왔다. 히브리인들은 400년 동안이나 이집트의 학정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지도력 아래 극적으로 탈출하였다. 이집트의 기마부대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뒤쫓아 오는데 ..., 혹은 걷고 혹은 뛰면서 필사의 힘으로 도망치니 그 끝이 바닷가였다. 죽을 일 밖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 때에 홍해가 갈라져 지나게 하더니, 히브리인들이 추격할 때엔 홍해의 갈라진 물이 다시 합하여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시켰다. 이런 일이 다시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탈출과 도주에 극적으로 성공하였다 하여도, 그 거대한 인파가 별다른 대책도 없이 또 아무런 생활도구도 없이 이리저리 유리한다는 것은 실로 문제였다. 외적(外敵)의 잦은 침입의 문제, 돌림병의 문제, 리더십과 통솔의 문제, 여론 분열과 통합의 문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역시 식량의 문제였다. 먹고 사는 문제였던 것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메추라기 같이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식량은 차치하고, 항구적으로 버티며 살기 위해서는 땅에서 나는 풍성한 곡식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가 여기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아우성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주려 죽느니, 차라리 그 야비한 이집트인들의 채찍 밑에서라도 연명하는 게 낫지 아니하냐?”(출 16:2-3). 첫 번째 감사절의 명령은 바로 이런 위기 속에서 왔다. “너희는 너희가 애써서 밭에 씨를 뿌려서 거둔 곡식의 첫 열매로 맥추절을 지켜야 한다”(출 23:16). “너희는 밀을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는 칠칠절을 지키고, 한 해가 끝날 때에는 수장절을 지켜야 한다(출 34:22). 히브리인들에게 첫 번째 감사절은 위기 속에 찾아온 감동의 축제였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인들이 홍해 바다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후 그들은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겼다. 식량의 문제로 인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다. 그리하여 살아있음의 절대적 한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고난과 위기의 날들 속에서도 은혜의 단비와 영광의 햇살 아래 첫 번째 농사가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밀알마다 생명의 의지에 대한 무한의 감동이 배어있었고, 곡식의 알갱이마다엔 하나님을 향한 다함이 없는 감사가 서려있었다! 나는 목회자로서 우리 성도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첫 번째 감사절의 감사가 맘속에서부터 넘쳐 오른다. 지금부터 30년 전, 20년 전, 혹은 7년 전... 미국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보스턴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가히 맨주먹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극단의 긴장과 두려움 속에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뎠다. 언어가 통하나, 아니면 문화가 익숙하나? 앞이 캄캄하였다. 먹고 살 것인가, 굶고 죽을 것인가? 그런데 7년이 흐르고 ... 20년이 흐르고 ... 30년이 흐르고.... 이제는 보란 듯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삶의 터전으로 크고 작은 기업을 주셨고, 육신의 장막으로 훌륭한 집을 허락하셨으며, 그 안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뒤뜰에서는 여러 가지 푸성귀가 소담하게 자라고 있다! 상추며, 고추며, 파며... 여름날 우리 성도들의 집 뒷뜰에서 자란 그 풍성한 푸성귀를 먹을 때마다 그 첫 번째 감사절의 진한 감동이 어찌 아니 없겠는가? 우리 교인의 자녀들이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일류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중요한 성취를 이루고... 할 때마다 히브리인들이 그 첫 번째 칠칠절을 당하여 하나님을 향해 품었던 그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우리에게 어찌 아니 없겠는가? 보스턴에 가면 무슨 일이 기다릴지 전혀 예상도 못한 채 길고 짧은 유학길에 오른 청년들, 칠흑같이 어두운 세월을 뚫고 믿음으로 출애굽을 시도하고 새로이 정착을 시도하는 모든 성도들...! 이 분들이야말로 하나같이 그 첫 번째 감사절의 감동을 이제 막 맛보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모든 영혼들이 어찌 아니 소중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영혼들을 어찌 그냥 버리시겠는가? 우리가 이민생활 중 혹은 유학생활 중 범사에 감사할 이유는 많다.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하여 하늘에 해를 띄워놓으시고 또 서산에 지게 하사 아침에 일어나고 저녁에 눕게 하시지 아니한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하여 비를 내리사 내 먹을 곡식을 풍성히 자라게 하시지 아니한가? 우리들 각자의 삶을 돌아보면서, 첫 번째 감사절의 그 다함이 없는 감동과 감사의 시간이어야 하지 아니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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