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명태조 주원장은 고려인이었다(4)
보스톤코리아  2006-10-26, 01:29:33 
<황주사의 중이 된 주원장>

이 장에서는 주원장이 어떠한 동기에서 중이 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주원장은 갓 날 때부터 줄곧 앓았기 때문에 살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아버지는 꿈을 꾸었는데 아들아이는 오직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현몽이었다. 아버지는 주원장을 중이 되게 하려고 절로 찾아 갔으나 절에는 한 명의 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아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때마침 아이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아기는 정말 울고 있었고, 아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아기는 젖을 먹기 시작하였고 몇 일이 지나자 불렀던 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아기는 자라면서도 계속 병을 앓았기 때문에 부모를 이만저만 걱정시킨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꿈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아들 주원장을 절에 데려다가 부처님께 바치겠노라고 약속했다.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황주사(Huangju Temple)의 고빈(Gao Bin)스님에게 보내서 중이 되게 하면 몇 년 전 꿈에 있었던 일로 하여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도 지키게 되고 또한 세끼 밥을 먹을 수 있게 됨으로 그대로 죽는 것보다 낳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버지는 아들을 부처님께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행치 못하고 그만 1344년에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가족이 전염병으로 죽은 후 의지할 곳이 없어 거지 행각에 나섰던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은 탄생설화에서 고승이 주원장은 절에서 키워야 한다는 전설로 변한다. 탄생설화 주원장전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의 꿈은 주원장은 부처님만이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섭리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째든 주원장을 절로 데리고 간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같은 동네에 사는 왕씨 부부였다. 주원장에게 자주 밥을 주었던 왕씨 부인은 주원장의 딱한 사정을 보고,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면 우선 의식주는 해결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전기의 작가는 「떠돌아 다니는 중」 (Wandering Monk) 이라는 소제목하에서 주원장이 황주사의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왕씨 부부와 주원장은 향과 초 그리고 약간의 제물을 가지고 황주사의 고빈스님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머리를 깍고 남이 입던 헌 법복을 받아 입고 합장 배례하는 법과 불공 드리는 절차를 배우며 중이 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전기작가는 주원장이 중이 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Consequently, in the nineth month The Huangju Temple gained a new young novice."
주원장이 황주사에 들어가 중이 된 것은 전후사를 감안하여 볼 때 16세로 추정된다. 중이 된 그는 절간의 마루바닥을 닦고 불을 피우고 종을 치고 밥을 짓고 상좌승들이 입던 옷을 빨고 절의 모든 잡일을 도맡아 해야했다. 그리고 아침 저녁으로 볼공 드리는 예식을 배워나갔다.
주원장이 중국의 황주사 중이 되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 있어서 승려는 이조시대의 중과 같은 신분이라 천하게 보였다. 남송의 유신이었던 사방득(謝枋得)은 원나라 때의 인간 존비(尊卑)의 사정을 10으로 구분하여 말하기를......7장(匠)8창(倡)9유(濡)10개라고 하였다. 유목민족인 몽고족 원나라는 유교와 불교 같은 종교에 대해서는 큰 미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서장의 라마교와 천진교(天眞敎), 백운종(白雲宗)은 보호를 받았지만 정토교(淨土敎)의 일파인 백련교(白蓮敎)는 탄압을 면치 못했다. 그러니 시주로 나선 탁발승은 거지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황주사의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황주사는 집세를 받아 꾸려 나갔다. 그 해에도 재앙이 너무 심했던 것으로 집세를 제때에 받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절의 모든 중은 밖으로 나아가 시주를 받아와야 했다. 절에 들어온지 50일 밖에 안 되는 풋내기 중 주원장도 밀짚모자를 쓰고 시주그릇을 들고 중옷으로 차리고 나왔다. 말로는 시주라고 하지만 그것은 구걸이었다. 걸승이 된 주원장은 남, 서쪽이 형편이 조금 낳다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향해 하염없이 걸었다.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세끼 먹을 것을 찾아 발길 닿는 데로 떠돌아 다녔다. 전기작가는 당시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So because his only objective was to get enough food survive........ He leaned all the tricks of begging how to sleep in the mountains and in the wilds and to bear all the discomforts of wind and cold."
이후의 전기작가의 말은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러면 주원장은 왜 그렇게 호된 고생을 사서 해야 했는가이다. 16세이면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알만한데 왜 거지승으로 구걸하면 산과 들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고생고생 했는가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위대한 대업을 성취하기 위하여는 원나라의 시조 칭키스칸과 같이 고생고생하여 위대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언어가 잘 통하지 못했고 그 지방의 지리에 어두었고 중국의 문화에 익숙치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앞서게 된다. 창업의 꿈은 처음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고난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고 타계하면서 위대한 꿈은 자라게 마련이다. 주원장에게는 불운한 운명을 당하여 7전 8기하면서 그것을 딛고 일어설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장은 3,4년 동안(안휘의) 서쪽지방을 돌아다니며 그 지방의 천민들과 같이 지내면서 백련교의 신앙을 받아드리고 비밀결사의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주원장이 15세 하산하여 각도를 돌아다녔고 하는 설화의 말과 주원장이 중국의 안휘성에 있는 황주사의 중이 되었다는 그 시기가 거의 같은 때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역사적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Biography of Zhu Yuanzhang (주원장전)는 최근의 역작으로 가장 믿을 만한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이 칭찬하고 있지만,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설명에는 여러 곳에서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고향산천인 안휘성 지방에서 걸승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3,4년간 방황하였으며, 둘째는 걸식하는 거지중으로 누구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학문과 무예를 익힐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원장은 불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중국의 강남지방으로 들어가 절을 찾아 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도 12세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중국의 당나라로 건너가 학문에 대성하였던 것이 아닌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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