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과 천연두 1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1-12-06, 12:07:39 
처용을 모신 망해사(신방사), 울산 광역시
처용을 모신 망해사(신방사), 울산 광역시
신라 49대 헌강왕 5년(880)에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순행중에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이르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입니다." 이에 왕은 담당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즉시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그래서 그곳을 개운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해 용은 기뻐하며 아들 7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황은 아름다운 여자를 골라 처용의 아내로 삼게하고 급간이라는 관직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몹시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모해 몰래 동침하였다. 처용이 자기집에 돌아와 두사람이 누워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그 노래가 다음과 같다.

"동경 밝은 밤에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 넷일터라. 둘은 내해이고, 둘은 뉘해인고. 본디 내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꼬."

그때 역신이 본래의 모양을 나타내어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아 말했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잘못을 저질렀으나 공은 노여워 하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이제부터는 공의 모양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일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그려 붙여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맞아들이게 했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혹은 신방사(新房寺)라 했으니 이것은 용을 위해 세운 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역신은 누구인가?

예전에 각종 질병에는 신이 있어서 그 신이 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역신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 질병은 두창과 홍역이었다. 특히 두창은 10여일만에 고열과 발진을 동반하여 생명을 잃게 되는 무서운 병으로 신라에서는 "질진"이라고 불렀고 다른 이름으로는 두창, 마마, 손님, 별신 등으로 불렀고 나중에는 천연두라고 불렀다. 마마라고 불리게된 이유는 왕이나 왕비처럼 극존칭을 써서 모셔야하는 귀하신 분이라는 뜻이고 "손님", "별신"은 특별한 손님이니 잘 모시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적사병(赤死病), 시두(時痘)라고 부르고 피부에 생긴 반점은 천화(天花)라고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치사율이 30%이상이 되고 어린 아이는 80%의 치사율이 되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다. 인류 역사상 30억명 이상이 이병으로 사망했고 그 두배가 넘는 사람들은 생명은 건졌지만 얼굴이 곰보가 되고 일부는 시력을 잃게 된다. 

천연두라는 말의 뜻은 "자연스럽게 얼굴을 얽게" 된다는 말이다.
천연두가 서역에서 들어온 무서운 역병이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당태종, 당고종 때의 일이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벌어진 삼국통일 전쟁(660~676)과 나당 전쟁은 신라, 백제, 고구려, 일본, 당나라가 17년에 걸쳐 싸운 세계 전쟁이었다. 당나라를 위해 돌궐, 해, 철륵은 당군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거란과 말갈은 고구려편에 섰지만 일부는 당나라편에도 가담하였다. 직접 전투는 하지 않았지만 토번과 설연타는 고구려편에 있었고 탐라 역시 백제편으로 참전했으니 모두 10여개 국가가 참전한 것이다. 20여년에 걸쳐 오랜기간 여러 나라가 함께 싸운 결과는 누가 이기고 지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각국은 못된 풍토병도 함께 나누게 되는데 천연두가 그 으뜸을 차지하고 있다.

말갈족은 원래 여진족들의 후예들로 청나라 만주족들이다. 이들은 천연두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청나라 초기에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청나라 숭덕제가 병자호란에 승리하고도 조선을 합병하거나 괴뢰정권을 세우지 않고 사람들만 잡아간 것은 천연두가 군대에 퍼질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황제  순치제나 숙부인 예친왕 두르곤 조차도 천연두로 사망할 정도로 예민했고, 심지어 누르하치의 두 손자도 명나라를 공격하던중 천연두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순치제의 여러 아들중 후계자로 오른 사람은 복전과 현엽이었는데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 신부에게 천연두에 대한 내성 여부에 대한 의견을 물어 이미 천연두에 걸려 내성이 있는 현엽을 후계자로 결정했으니 그가 바로 곰보 황제 강희제였다. 역병은 외부로부터 새로운 병균이 유입되면서 발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타 지역과의 인적 교류가 수월할수록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서기 644년 당나라 신당서 기록에 5개주에서 역병이 만연하여 배를 마주하고 죽은 사람들이 즐비하다고 하였으니 당시 한반도로 유입된 당나라 군사들은 물론이고 신란 군사들도 덩달아 역병에 감염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으로 문무와 11년(671)에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백제와의 웅진 싸움에서 패배한 뒤에 문무왕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당시 신라에는 이미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 없었음에도 설인귀를 도와주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것은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고자했던 신라의 정치권력이 역병 유행 사실을 은폐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이현숙 교수)

성덕왕 13년(715), 가뭄중에 역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색적인 것은 성덕왕 재위중에 죄수들을 모두 9번에 걸쳐 사면했다는 사실이다. 죄수를 사면하는 것은 새로 왕이 즉위할때 하는 것이고 그 뒤에 사면하는 것은 국가 변란이나 역병이 있을때 감옥을 비우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특히 성덕왕때는 인구가 급감해서 2군 7현을 폐쇄했다고 하니 역병의 피해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럴경우에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는 민초들의 피해를 절대로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피해를 당하는 당사자는 왕보다는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짧은 기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현상을 역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역병이 고구려에서 4차례, 백제의 경우는 6차례, 신라의 경우는 8차례, 통일신라에서는 13번의 역병이 발생하였다. 엄청나게 많은 빈도로 발생한 것이다.

경덕왕 14년, 755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는 중에 그의 어머니가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다. 향덕(향득)이라는 사람이 밤낮으로 봉양했으나 먹을 것이 없어 자신의 넓적 다리살을 떼어 먹게하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완쾌시켰다. 향덕의 어머니는 역병 환자였던 것이다. 역병(천연두)는 왕후장상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찾아온다.

신라 37대 선덕왕(785)은 천연두로 15일만에 사망했고, 신라 40대 문성왕(857) 역시 천연두로 17일만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왕의 숙부인 헌안왕이 뒤를 이었는데 그 역시 4년만에 사망하고 그 뒤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주인공 경문왕이 뒤를 이었는데, 경문왕 치세중에 3번에 걸쳐 3년 터울로 역병(천연두)이 유행하여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명나라때의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는 산수유 열매를 으깨서 얼굴에 난 두창에 바르면 효능이 있다고 했는데 경문왕이 대나무 대신 산수유를 심은 것이 납득이 간다. 지금도 도림사 근처로 추정되는 경상북도 월성군 내동면 구황리 근처에는 산수유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일본의 천연두
일본은 성무천황때 대중들에게 천연두가 발병할때 이를 보고하게 하는 중국의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때 작성한 기록으로 735~737년 사이에 발생한 천연두의 유형을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 아시아 대륙간의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심각한 발병사태가 여러번 발생하게 된다.

서기 735~737년에 규슈 후쿠오카 다자이후에서 천연두가 발생하고 이 병이 북규슈에 퍼져 규슈의 많은 소작인들이 사망하고 농작물을 버리고 도망하면서 기근이 겹치게 된다. 737년에 일본 정부 관리가 규슈에서 천연두에 감염된 체로 교토로 돌아오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성인 인구의 25-35%가 사망했는데, 당시 일본의 실권자였던 후지와라 ­4형제를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사망하여 정권 공백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역병 발생에 책임감을 느낀 쇼무 천황이 동대사 대불전 건설을 추진하였는데 국고가 텅비게 되어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작성자
김은한 칼럼니스트    기사 더보기
의견목록    [의견수 : 0]
등록된 의견이 없습니다.
이메일
비밀번호
한담객설閑談客說: 새마을 창고 2021.12.13
사진 한장이 눈에 띄였다. 어느 유명작가의 오피스였는데 벽에 건 사진인가 회화작품이다. 배경색은 온통 엷은 살구색과 검은색이었다. 조화로워 보였고, 따뜻함이 물씬..
<요가쏭의 5분요가> '위드 코로나'시대 일주일1번은 꼭 해야하는 하체운동 2021.12.09
아름답고 건강한 몸을 가꾸려면 유산소 운동 (걷기, 달리기, 자전기, 줄넘기, 수영 등)을 통해 꾸준히 체중관리를 해나가고, 이와 더불어 강도있는 근력운동을 적어..
처용과 천연두 1 2021.12.06
신라 49대 헌강왕 5년(880)에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순행중에 개운포(지금의 울산)에 이르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서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히 여겨..
ETF(Exchange Traded Fund)란 무엇인가? 2021.12.06
2021년 7월 말까지 투자자가 ETF에 $705 billion 이상을 투자했다. 미국에서 뮤추얼 펀드 투자 규모가 $40.7 trillion 이상이다. 여기에..
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2021.12.06
김양도가 22세 풍월주에 오르면서, 그간 화랑도들이 심신을 수련하는 선문仙門내에서 내려오던 폐습 중의 하나인 ‘청례靑禮와 옥로玉露’를 폐지하였다. 청례란 낭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