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서는 공주, 부여에서 미마지의 기악을 공연하고 당시의 가면을 만드는 등 미마지 회고 붐이 불고 있다고 한다. 일본서기 스이코(推古) 천황 20년에 백제인 미마지(味摩之)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백제인 미마지가 귀화하였다. “중국 오(吳)나라에서 배워서, 기악(伎樂)의 춤을 출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영정(瓔井)에 살게 하여 소년을 모아 기악의 춤을 배우게 하였다.
진야(眞野) 수제자, 신한제문(新漢濟文) 두 사람이 배워서 그 춤을 전하였다. 이것이 지금의 대시수(大市首), 피전수(避田首)등의 선조다.” 미마지 기악은 나라 동대사(東大寺) 낙성식 때 공연되었는데 그 때 사용한 탈과 입었던 옷, 허리띠들이 악기와 함께 정창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서기에 기록되기로는 미마지가 중국 오(吳)나라에서 기악을 배웠다고 써 있는데 그 당시 중국에는 오(吳) 나라가 없었다. 미마지가 고구려 탈춤을 추었으니 고구려에서 기악을 배웠다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시텐노지(四天王寺) 왓쇼이 마쯔리
예전에 나니와(지금의 오오사카) 항구는 일본의 관문 역할을 하던 나루터였는데 이곳에 백제 사람들을 태운 배가 도착하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멀리서 온 손님들을 맞으며”왓쇼이”를 외쳤다고 한다. 무사히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는 표시였는데, “왓쇼이” 라는 말은 한국어 “왓소” 가 어원이라고 한다.
마쓰리는 일본말로 축제라는 뜻인데 한국어 “마즈리”를 어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년 11월 3일(문화의 날)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각 시대 인물로 분장한 수많은 한반도 사람들이 사천왕사 까지 행진하는 것이다. 성덕 태자에게 불교와 학문을 가르쳐준 고구려의 고승 혜자를 선두로, 가야의 우륵,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 박사, 신라의 태종 무열왕, 조선조의 세종대왕과 조선 통신사들이 행진하여 사천왕사에 도착하면 성덕태자와, 문부대신, 예전의 만요시인 카기노모토 히토 마로 등의 영접으로 마쓰리가 끝이 난다. 한국의 대통령과 일본 수상이 마쯔리를 통해 한일 양국의 우호친선을 권장하는 메씨지를 전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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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 금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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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대웅전) 내부, 중앙에 성덕 태자의 본지불인 구세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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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 인왕상이 양쪽에 서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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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아미타 여래상과 십일면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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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중탑, 석가의 진신 사리가 봉안 되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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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밖에 있는 석조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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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시당과 석무대, 육시당은 천태종의 창시자인 사이초우(767-822)가 세웠다. 해상왕 장보고의 도움으로 당나라에서 천태종을 수학하고 일본 천태종을 열었다. 매년 4월 22일 성덕태자 기일에는 석무대에서 성령회 무악 대법요가 거행되고 있다. 석무대는 백제 사람 미마지의 공연 무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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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 대사당, 천태종을 중흥시킨 원삼대사를 모신 국가지정 문화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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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회 무악 대법요. 성덕 태자 기일에 열리는 성덕태자 추모회. 미마지가 공연하던 석무대에서 벌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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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 여래와 관음, 대세지 보살. 가부좌를 한 아미타여래상과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춤을 추는 듯한 자세의 관음 대세지 보살상이다. 원래 이러한 짝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둘다 8~9세기에 제작된 불상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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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 태자가 소지하였던 병자초림검과 칠성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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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피리, 용피리. 성덕 태자가 애용했던 피리. |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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