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10. 불교 전쟁과 사천왕사 |
보스톤코리아 2011-08-22, 15:37:50 |
숭불파(崇佛波)인 소아마자(蘇我馬子)대신과 요메이 천황의 아들 성덕태자가 군사를 거느리고 아도로 쳐들어 갔지만, 물부의 군대가 강력해서 승불파가 3번을 연속해서 패전을 하였다. 더구나 마지막 전투에서는 성덕 태자가 물부수옥의 군대에게 포위 당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천왕사의 금당에는 성덕태자의 본지불인 구세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지만 그 주위에는 약속대로 사천왕을 모시고 있다. 소아마자 대신도 발원하기를 “모든 천왕, 대신왕(大神王)이 나를 도와 지켜 이기게 하여 주시면 제천왕, 대신왕을 위하여 사탑을 건립하여 불법을 크게 펴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역시 일본서기와 부상략기에 기록 되어 있다.
성덕 태자는 후일에 일본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자 이화위귀 (以和爲貴)라는 통치 철학을 내세웠다. 즉 회합함으로 귀함을 얻는다는 것이다. 불교를 믿는 국민들과 신도를 믿는 국민들이 화목하게 지낼 것을 주문한 것이다. 그래서 내건 강령이 “신불 습합” 즉 신도와 불교가 흡수, 합일하자는 것이다. 뜻은 좋았지만 두 종교가 믿는 대상이 전혀 다른 종교라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전쟁에는 패했을 지 몰라도 신도는 일본의 국교로 지금껏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도 승군사에서 500m 떨어진 곳에 물부수옥의 묘지가 있다. 묘지의 주위에는 건국 각지 신사에서 그를 기리기 위해 보내온 100개가 넘는 비석이 둘러 싸고 있다.
성덕태자는 약속한대로 사천왕사를 건축하는데, 그 당시 왜국의 건축 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백제에서 기와공, 주물공, 화가, 불사 (佛師)를 데려오고 4명의 감독관이 파견 되어 왔다. 도자(圖子), 다문(多門), 금강(金剛), 중촌(中村) 네 명이었는데 금강씨의 본래 이름은 문화 유씨 유중광(柳重光)으로 금강이란 성은 요메이 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은 성이라고 한다. 금강 중광(金剛重光)씨는 사천왕사가 준공된 다음에, 성덕태자가 사천왕사의 유지와 보수 공사를 계속 맡아 줄 것을 요청해서 1400년이 넘게 대를 이어 가면서 사천왕사를 돌보고 있다. 나머지 세 명의 감독관은 사천왕사를 완공시키고 그 다음 법륭사(호류지)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금강중광은 금강조(金剛組)라는 사찰과 신사를 건축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지금까지 1400년이 넘게 똑 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현재 사장은 39대 요시다카 콩고(金剛利降) 사장이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회사로 타임지 표지에 소개가 되었다. 사천왕사의 중심가람은 중문(中門), 오중탑(五重塔 ), 금당(金堂), 강당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일직선 상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싼 형식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람 배치로 일컬어 지고 있다. 이렇게 중심 가람이 일직선 상에 있고 1탑(塔) 1금당(金堂) 형식을 일본에서는 사천왕사식 가람 배치라고 하는데 원래 이것은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일본 고대 사찰은 거의 다가 1탑 1금당으로 백제식으로 건축하였다. 고구려식 사찰은 1탑 3금당이고 신라식은 2탑 1금당이 된다. 일본에 있는 거의 모든 절들이 백제식으로 건축 되었는데, 아스카사(法興寺)와 교토의 도지(東寺), 도호쿠시(東福寺)는 고구려식으로 건축되었다. 신라식으로 지은 절은 일본에는 없고 경주 불국사가 대표적인 신라식 사찰이다. 이렇게 한반도 3국이 탑과 대웅전의 양식이 다른 것은 탑과 대웅전중 어느 것이 그 사찰의 중심 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대체로 삼국 시대에는 탑이 절의 중심 이었다. 경주의 황룡사, 사천왕사, 백제 부여의 정림사의 경우는 탑이 사찰의 중심이었다. 탑 속에 사리를 봉안하여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양산의 통도사와 강원도 상원사도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하여 탑이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사찰의 중심이 대웅전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신앙의 대상이 부처님 사리에서 불상으로 바뀌어 불상이 모셔진 금당이 종교 의식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해인사, 화엄사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오오사카의 사천왕사는 탑과 금당에 비중을 나누어 같게 하는 중간쯤의 위치에 있는 절이다. 사천왕사는 몇 차례에 걸친 천재지변과 전쟁으로 소실되고 파괴 되었다. 2차 대전 말기에는 공습으로 육시당, 원삼 대사당 및 산문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파괴되어 지금의 사찰은 전후에 복원한 것이다. 우리 백제 사람들이 세운 옛 건물은 모두 파괴 되었다. 딱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육시당 앞에 있는 석무대(石舞臺)뿐이다. 이곳은 백제 사람 미마지(味摩之)가 음악을 연주하며 고구려의 사자 춤을 가면극으로 공연했던 곳이다. 미마지의 음악은 뒷날 일본 왕실 아악의 기본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그를 일본 아악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석무대에서 매년 4월 22일 성덕태자의 기일에는 춤과 음악을 공연하는 쇼료에(聖靈會)가 열린다. 이때 연주되는 음악은 궁중이나 절, 신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악으로 천왕사방(天王寺方)이라고 한다. 무대 우측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우호(右方)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삼한에서 전래된 것이고 좌측에서 연주되는 사호(左方)는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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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전주류씨 류기송입니다. 백제 때의 류(柳)씨에 대한 기록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금강씨의 본래 이름은 문화 유씨 유중광(柳重光)으로"라는 글이 있는데 문화류씨는 백제 때 없었으며, 고려초에 창성된 성씨입니다. 그러나 전주류씨는 신라 때도 각간을 하신 류기휴라는 분이 고려 때 류방헌묘지명에 나옵니다. 따라서 유증광은 전주류씨가 아닌지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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