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백제 문화를 찾아서 : 곤지 왕을 제신으로 모신 아스까베 신사 |
보스톤코리아 2011-06-27, 15:13:53 |
곤지왕은 누구인가? 지난 칼럼에서 곤지왕에 대해 소개한 바 있지만, 다시 부연하면 , 그는 백제 개로왕의 동생으로 왜 국에 백제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파견된 백제의 2인자였다. 그는 후루이찌(古市), 이즈미(和泉), 남세쯔(南攝津)를 아우르는 가와 찌(河來)에 백제 도래인들을 중심으로 아스까베 왕국을 건설한 정복 왕이었다. 백제에서 문주 왕이 암살 당하고 뒤를 이은 삼근 왕도 사망하자 곤지왕의 둘째 아들인 말다(末多)가 귀국하여 동성왕(東城王)이 되었고, 동성왕도 암살 당하자 개로 왕의 아들로 그의 양자인 사마왕자가 백제로 가서 무령왕으로 즉위하여 백제를 중흥 시키게 된다. 곤지왕은 백제와 왜국 양쪽에서 권력의 핵심에 서있던 백제 왕족이었다. 곤지왕을 제신으로 모신 아스까베 신사는 오오사카 남쪽의 하비키노시 아스까 마을에 있다. 오오사카에서 아스카베 신사를 가려면 “아베노바시” 역에서 긴테쓰 전철(近鐵線)의 남대판선(미나미 오오사카선)을 타고 17번째 역인 카미노 타이시(上太子)역에서 내리면 된다. 대략40분 이상 걸리는 먼 거리다, 전철을 탈 때 앞쪽 3칸 중 하나를 타야 목적지까지 가게 된다. 15번째 역인 후루이치(古市)역에서 전철을 분리해서 앞의 3칸은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라의 가시하라와 아스카 방면으로 가는데 두 정거장 더 가면 목적지 카미노 타이시 역이 된다. 전철역을 나오면 우측 등성이에 공동묘지가 있고 왼쪽으로 자동차가 겨우 다닐만한 골목길이 빼곡하게 들어찬 주택가를 양쪽에 두고 뚫려 있다.
1400년 전에 다케노우치 가도 (竹內街道)라고 부르는 일본의 1호국도였다. 이길이 가와찌 아스카에서 야마도 아스카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 길로 200m쯤 가면 세갈래 길이 나오는데 오른쪽 오르막 길로 접어들면 100m거리에 돌로 만든 도리이가 길 가운데 버티고 있는데 아스까베 신사(飛鳥戶神社)라고 쓴 편액이 달려있다. 도리이를 지나 100m 를 더 가면 오른쪽에 아스까베 신사가 있다. 원래 이름은 곤지왕 신사(昆枝王) 였는데 일제 시대때 한반도 계 이름을 없애려고 아스까베 신사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그 당시 일본 사람들은 한일 동족론과 관련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숨기려고 하였다. 더구나 한국이 본가(本家)가 되고 일본이 분가(分家)가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아스까 베 신사는 일본 황실이 모든 왕실의 제도와 규범을 정하고 신사의 등위를 정한 연희식(延禧式)에 따르면 정 4위에 속한 황실 사당인데 등위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퇴락해 가는 신사였다.
백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 한반도 포도를 재배한다니 묘한 인연이다. 예전에는 신사 주위의 산에 백제 사람들의 묘제인 횡혈식 석실분들이 무척 많아서 이 고분들을 아스카 천종(千塚)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개발의 붐을 타고 50여 기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 족장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고분을 간논즈카 고분이라고 부른다. 필자가 간논즈카 고분을 찾아 갔을 때는 비가 몹시 내렸는데 산을 오르다가 미끌어져 큰 대 자로 넘어지는 불상사를 당하기도 했던 곳이다. 일본서기에 기록되기는 서기 461년 유라꾸(雄略)기 6년에 곤지왕이 왜국에 왔는데 후루이찌에 횡혈식 고분군이 조성되기 시작 한 것은 4세기 말이다. 그가 도착하기 100년 전부터 이곳에 백제인들이 모여서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기존의 백제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아스까베 왕국을 세우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아스까베 신사 근처에 오진 천황릉(호무다이묘산)이 있고 사카이시에는 길이만도 486m나 되는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의 닌토쿠 천황능이 있다. 그런데 백제인들의 횡혈식 무덤군들이 이들 거대 무덤을 둘러 싸고 있다. 원래 오진릉, 닌토쿠릉 이라고 부른 것은 어떤 고증이나 확인을 거쳐서 명명한 것이 아니다. 헤이안 조와 도꾸가와의 에도 막부시대에 왕들의 무덤 리스트를 만들면서, 이 지역에서 제일 큰 무덤을 오진, 닌토구릉으로 정했을 뿐이다. 천황들의 고분 중에서 피장자를 확인한 고분은 천지 천황과 천무천황릉뿐이다. 그래서 근래에는 오진릉이라는 이름대신에 고분이 위치한 지명을 쫓아 콘다야마릉으로 닌토구릉은 대산릉으로 부르고 있다. 대산릉이 있는 지역에는 2차대전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백제 국민학교를 위시해서 백제강, 백제교가 있었고 도시이름도 백제군이었다. 예전부터 이곳은 백제 도래인들이 살던 고장으로 마을의 중앙에 대산고분이 100여기의 횡혈식 무덤에 둘러 쌓여 있다 대산 고분 옆에는 하치만 신궁이라는 신사가 있는데 연희식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이름이 백제사(百濟社)로 되어있다. 왕의 무덤 옆에 잇는 신사는 피장자의 신분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백제 사람이고, 당시 이곳 아스카베 왕국의 수장인 곤지왕자나 그와 관계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일본 황실 궁내청은 콘다야마, 대산릉의 내장품 공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1872년에 콜럼비아 대학의 사학자 Ryusaku Tsunoda교수가 폭풍으로 대산릉이 파손되었을 때 그 안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아주 많은 한반도 유물들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3세기경에 출판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왜국에는 말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고 , 일본서기에 기록되기로는 오진천황 15년에 백제의 아직기가 2마리의 말을 가져온 것이 일본말의 효시가 된다고 한다. 대산 (大山)릉에는 한반도 식 마구와 철제 무기류가 부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한반도 부여 계 도래인 정복자의 왕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산 고분과, 규슈에 있는 백제 후국 구마모토 후나야마 고분에서 나오는 유물이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의 부장품들과 일치 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이다. 특히 백제계왕을 상징하는 환두대도, 수대경, 금동신발 등과 마구, 마탁, 투구 등이 나왔다. 이 세 무덤의 피장자들이 같은 문화 유물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 것일까? 대산릉의 피장자는 후나야마 고분의 피장자처럼 백제 후국의 왕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 사학자 이시와 타이신 치로(石信一郞) 씨는 오진릉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 백제에서 건너온 곤지왕자라고 주장하였다. 또 대산릉의 피장자도 곤지왕 계의 사람으로 추정하였다. 와세다 대학의 미즈노 유 교수와 도쿄대학의 마쓰사다(井上光貞)교수는 오진천황이 백제 도래인 곤지 왕자라고 주장 하였다. 곤지왕의 실체를 밝혀주는 기록으로는 왜 왕무 (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가 있고, 백제 왕이 왜 왕지(旨)에게 하사한 칠지도의 명문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넘기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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