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2-02-03, 12:35:29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연을 이어주는 월정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연을 이어주는 월정교
원효대사는 신라 진평왕때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압량주 밤골에서 육두품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 아명은 서당, 또는 신당으로 불렸다. 그러나 출가한 이후에는 고선사와 분황사에서 수많은 불경을 저술해서 법명을 "분황"으로도 불렸다.
그의 어머니가 만삭의 몸으로 원효를 임신하고 밤나무 밑을 지나가다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틈이 없이 남편의 옷을 나무가지에 걸고 해산했기 때문에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고 불렀다.
이는 석가 세존이 사라숲에서 태어나고,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하였으며 사라수 아래에서 입적하였기 때문에 원효대사의 탄생을 이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한 언덕에는 신라 31대 신문왕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자리가 남아 있어 그 자리가 원효가 태어난 장소로 추정하고 있다. 
원효는 이미 7살의 어린 나이에 산에 가기를 좋아해 조부가 따가운 햇볕과 비를 피할 수 있도록 초막을 지어 초계사(草係寺)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대사는 15세때 출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살던 집을 헌납해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고 자신이 탄생했던 사라수 곁에 절을 지어 사라사라 불렀다. 대사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는데 대각국사 의천 화상이 남긴 글에 의하면 지금의 전주에서 고구려 고승 보덕화상 문하에서 배웠으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혜공대사에게 질문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 등 수많은 경전을 저술했는데 화엄경소는 10회에서 절필하여 그 이후에는 새로운 저서는 더이상 없게 된다. 이는 원효대사가 저술하는 것 보다는 신라 민중 속에서 불교를 보급하는데 주력하였기 때문이었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 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
661년에 원효, 의상이 당성의 고분에서 해골물까지 마시고 의상대사를 당나라로 떠나보내고 원효대사는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즈음에 원효대사는 "수허 물가부 아작지 천주"라는 뜻모를 노래를 지어 부르며 아이들도 따라 부르게 하면서 마을을 돌아다녔다.
이 노래는 시경에 나오는 빈풍벌가(豳風伐柯)를 패러디한 것으로 그 뜻을 풀이하면 "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라는 노래였다. 서라벌에 살고 있는 아무도 노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태종무열왕이 노래의 참뜻을 훤히 알고 있었다. 무열왕은 이어서 "이 스님은 필경 귀한 부인을 얻어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자루없는 도끼는 과부 여인을 말하는 것이고, 떠받칠 기둥은 사내아이, 아들을 얻고 싶다는 말이다. 이후에 무열왕은 원효가 점찍은 상대가 자신의 둘째딸 요석공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석공주는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에서 원효와 만나기 전에 화랑 김흠운에게 시집갔으나 655년 백제와의 조천성(지금의 옥천) 싸움에서 전사하여 일찍이 과부가 되어 두딸과 함께 요석궁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무열왕은 요석공주를 원효와 짝지어줄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요석공주 역시 그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한번은 공주가 원효를 위해 승복과 모란을 선물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는 몇일이 지나 원효가 남산에서 내려와 요석궁 근처의 문천교를 지난다는 것을 궁인을 통해 듣고는 대사를 꼭 모셔올 것을 지시하였다. 요석궁과 문천교는 지척간에 있었다.
나졸들이 문천교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대사가 오는 것을 보고는 일제히 길을 막고 요석궁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가 웃으며 못가겠다고 하자 나졸의 수장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으로 가고,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둘이 무술을 겨루었지만 일찌기 무예가 출중했던 대사를 이길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생겨도 요석궁으로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은 나졸들은 일제히 대사에게 달려들었지만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덤벼드는 나졸들을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밑에서 허우적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과 함께 원효대사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이 기뻐하며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모시고 갔다. 젖은 옷을 말려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요석궁에서 3일을 머물렀는데 이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이 태어나게 된다.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동침한 관계로 이제는 파계승이 되었다. 스스로를 낮추어 아랫 것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위치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부르고 대중들에게 불교를 전하게 된다.
당시 신라는 불교국가였지만 왕과 귀족들만을 위한 국가로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싶어도 너무 어려워서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원효대사는 어려운 불교 교리 다 필요없고 다만 나무아미타불을 10번만 말하면 손쉽게 서방극락정토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원효대사는 3일의 신혼 후에 만류하는 요석공주를 이별하고 본인의 고향 압량(지금의 경산) 반룡사를 향해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만삭이 된 요석공주가 남편을 보지 못하고 반룡사에서 멀지 않은 삼성산 유곡동의 한 민가에서 아이를 낳게 되었다. 바로 이 아이가 신라 10현 유학의 태두이며 이두를 집대성한 설총 그사람이었다. 홍유후는 고려 현종이 설총에게 추후에 기증한 시호로 "홍유후 실기"에는 원효대사의 아이를 가진 공주가 시댁 동내를 물어물어 찾아와 유곡에서 아이를 낳고 유천에서 아이를 키웠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유곡, 유천 두 지명은 삼성산 근처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남산면의 동리 이름이다.
설총은 어린 시절을 압량(경산)에서 보냈는데, 태종무열왕은 요석공주와 손자 설총을 보고 싶으면 수시로 왕후와 함께 구룡산 고개를 넘어와 반룡사에서 치성을 드렸는데 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왕재(王峴)고개라고 불렸다고 한다. 
설총은 일찍부터 신라 사람들에게 괄목할만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그중의 으뜸은 한자를 우리식으로 풀어쓰게 만든 이두를 집대성한 것이다. 
어릴적부터 경전과 역사를 깨우쳤고 문장의 솜씨가 탁월하여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대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의 유일한 작품 "화왕계"를 남기고 있다.
아버지 원효가 신라 불교에 한 획을 그었다면 신라 유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은 설총이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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