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장군 2
보스톤 전망대
보스톤코리아  2021-04-05, 11:24:28 
608년에 건설한 영제거,통제거,광통거는 경제, 군사,  정치의 중심지였다
608년에 건설한 영제거,통제거,광통거는 경제, 군사, 정치의 중심지였다
당나라 덕종 년간에(766-779) 서주(徐州) 이영요가 난을 일으켰다. 당시 당나라는 안사의 난 후유증으로 국력이 쇠진되어 반란을 제어할 힘이 없었다. 이정기를 비롯한 여러 절도사들이 일제히 이영요를 공격하여 그를 굴복시켰다.

이정기는 이영요 반란 토벌을 명분삼아 영토를 확장시켜 서주를 비롯한 조주, 복주, 연주와 운주를 추가로 획득해 이제는 모두 15개주에 달하는 당나라 최대의 절도사가 되었다.
이정기에게 이영요 토벌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5개주의 영토를 넓힌 것뿐만 아니라 지금의 숙주로 불리는 용교, 와구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용교는 중국 남부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했던 요충으로 남부 호남의 식량과 물산이 집결했던 운하의 도시였다.

중국 사람들은 운하를 통제거, 영제거라고 부르고 장안, 낙양 부근의 운하는 광통거라고 불렀다. 그런데 장안, 낙양에 필요한 모든 운송 화물은 용교와 와구를 통해서 운송되어야 했다. 그러니 이 운하는 당나라 황실에게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생명줄을 열고 닫는 것이 이정기의 소관이 되었으니 당 황실이 이정기에게 목줄을 잡힌 형상이 된 것이다. 

실제로 이정기는 당 황실의 처사가 불만스러워지면 주저하지 않고 용교의 물길을 닫아버리곤 하였다. 그리되면 당 황실은 주저하지 않고 이정기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벼슬을 더 올려주는 것이 순서였다.

781년에 절도사 이보신이 사망하였다. 당 덕종이 이보신 아들 이유악에게 절도사의 지위를 세습시키지 않으려고 하자 이정기, 이유악, 양숭의, 전열 절도사들이 반발하여 용교, 와구의 수로를 막아버리니 온 천하가 근심에 휩싸였다고 구당서에 기록되었다.

이럴 경우에 당나라는 이정기를 달래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당나라는 이정기에게 최고의 영예를 선물한다. 그에게 당나라 황제 바로 밑의 지위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신하에게 주는 최고의 직함을 수여하고, 검고상서 우복야, 요양군왕과, 검교사공의 벼슬을 추서하였다.

지금 이정기가 통치하고 있는 15개주 영역은 지금의 산동일대와 안휘성, 강소성까지 포함하여 한반도 지역보다도 넓었고 인구도 고구려 패망 당시보다 많았다. 치청은 호구 84만에 5천 400만 인구였는데 예전 고구려 호수는 69만이었다고 한다.

건중(建中) 년간(780-783)에 이정기가 수도를 낙양에서 가까운 운주로 옮기자 당 조정은 이에 대응해서 변주에 9만 2천명의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에 이정기는 조주에 또다시 증원군을 파견하였다. 당 조정은 이번에도 다시 벼슬을 올려주려고 하였지만 이번에는 대응 방법이 전혀 달랐다. 이정기는 최후의 대결을 보려고 하였다. 제음 벌판에 10만의 군사를 모아 주야로 훈련에 열중하여 당나라의 거점인 낙양과 장안을 겨냥하고 있었다. "하남이 소란스러웠고 온천하가 근심에 휩싸였다."라고 구당서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다. 마지막 거점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두고 이정기는 49세의 나이로 급저하였다. 악성종양이었다.

이정기의 군사들은 슬픔을 참으며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정기 사망소식이 알려지자 조야는 황제 덕종 이하 문무 관원들이 기쁨에 겨워 3일동안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782년 11월 이정기 장군의 아들 이납은 국호를 "제"라고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문무 백관을 임명하고 나라를 꾸려 나갔다. 이정기가 사망하고 한달 뒤에 이정기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래서 당나라는 용교, 와구 운하를 다시 개통시킬 수 있었다.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한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를 공격했으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준비한 배 3천척이 가을 장마비에 떠내려가 버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곳 용교에 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백거이가 이정기의 사촌들을 설득하여 항복을 하게 했다고 한다.

이납은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782년에 회서의 이희열과 힘을 합쳐 변주를 재탈환해서 다시 운하 운행을 중지시켰다. 이때 당 덕종도 세가 불리해져 이납과 화해하고 이납은 치청 왕국의 수성에 힘을 썼다고 한다.

784년에 당나라 장수 유흡이 이납의 부하였던 고언소가 사수하고 있던 송주(서주 부근)를 공격할 때 인류 최초로 화약을 사용해서 공격한 적이 있었다고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어떤 화약을 사용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고 성벽과 방어물을 불태운 정도로 알려졌다. 화약을 중국이 먼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고려말에 최무선이 발명한 것이 제대로 된 화약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806년에 이사고가 죽자 그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뒤를 이었다. 당나라 11대 황제 헌종은 절도사들에 대한 토벌에 열심히 나섰다. 807년에 진해 절강성 절도사 이기를 정복했고, 816년에 위박 절도사 전홍정의 투항, 성덕 절도사 왕승종, 회서 절도사 오원제를 정벌했다. 이제 남아있는 군벌은 치청 절도사 이사도가 마지막 남은 절도사였다. 당 헌종이 회서를 치자 이사도 장군은 그 이듬해에 군량이 쌓여있던 하음전운원을 불살라 버리고 당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번진 토벌을 주장하던 재상 무원형을 암살시켰다.

818년에 삼국사기 본기에 41대 헌덕와 11년 기록이 있다. 7월에 당나라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 헌종이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양주 절도사 조공(趙恭)을 보내 우리 병마(신라)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순천군 장군 김웅원에게 명하여 우리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가서 조공을 돕게 하라고 하였다. 이는 신라군 3만명이 이사도 군을 치려고 해외 파병을 했다는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당 헌종은 816년에 무령군 선봉장 왕지홍에게 치청 평음을 점령하게 하고 819년에는 선무, 위박, 의성, 무령군이 이사도 군을 협공해 이사도 군이 8만의 병사를 잃었다. 이에 이사도의 수하 장수 유오는 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운주성에서 이사도 장군을 죽이고 당에 투항하였다. 819년 55년동안 고구려를 계승해 왔던 치청 왕국은 무너지게 되었다.

당나라의 보복은 잔인하고 처참하였다. 1,200명의 제나라 군사들은 학살 당했다. 죽은 병사들의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자치 통감에는 붉은 안개의 높이가 자욱했고, 역사학자 사마광은 당나라의 처사가 잔인했다는 평을 하고 있었다. 당나라는 제2의 이정기 출현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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