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10 : 교태전(交泰殿)-2 |
보스톤코리아 2010-05-17, 11:55:41 |
많은 건물들의 곳곳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장식되어 있어 이곳이 많은 여인들이 살고 있었던 처소 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교태전 앞쪽 양의문 좌우로는 상궁들의 처소였던 수많은 행낭들이 늘어서 있고, 뒤쪽으로는 경회루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으로 쌓아 올린 아미산(蛾眉山)이라는 작은 둔덕이 있는데 층층이 꽃밭이 일구어져 있다. 꽃밭 사이로는 육각형 모양으로 주황색을 띈 4개의 굴뚝이 서 있다. 교태전 온돌을 데우고 난 연기가 이 굴뚝으로 빠져 나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굴뚝의 옆면에는 귀면이나 봉황, 십장생, 사군자, 만자문(卍字紋), 당초문 등의 길상문(吉祥紋)을 구워 박아 넣고 있다. 이 굴뚝들이 원래의 경복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몇 개 안 되는 건축물로 국보 811호다. 왕비들은 건순각(健順閣) 에서 아미산 후원을 바라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27명의 왕과 44명의 왕비가 있었다. 왕비의 평균 수명이 50세로 왕의 평균수명 보다 3년이 길지만 스트레스와 운동부족으로 단명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가문으로는 청주 한씨가 5명, 파평 윤씨, 여흥 민씨가 4명, 청송 심씨, 안동 김씨가 3명의 순서였다. 역시 세력 있는 집안의 규수가 왕비로 많이 뽑힌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왕비나 세자빈을 뽑으려면 간택의 절차를 거쳐야 했었다. 먼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려 9~14세 사이에 있는 사대부 집 규수들의 처녀단자를 받는 것으로 간택을 시작한다. 2번의 간택을 거쳐 마지막 3명의 후보를 선택하는데 세 번째 간택은 왕, 왕대비, 왕비(세자비 간택 때) 앞에서 마지막 결정을 한다. 헌종은 세자 때 세자빈 간택을 자신이 처음부터 나서서 결정하기도 했고, 영조대왕도 평생의 배필 정성왕후를 사별하고 66세 때 왕비 간택을 했는데 자신이 직접 선택한 예도 있었다. 마지막 간택까지 올라간 후보자는 탈락이 되면 시집을 갈 수 없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처녀로 늙든지, 후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에서는 세종대왕 때 문종의 세자빈을 뽑는 것으로 최초의 간택을 시작하였다. 원래 문종은 학문에 심취해서 여자를 소 닭 보듯 하던 분이었다. 첫 번째 세자빈이 독수공방으로 지내다가 문종이 궁인과 관계 했다는 것을 알고는 투기를 심하게 하다가 폐출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조 역사상 처음으로 간택을 해서 두 번째 세자빈으로 된 사람이 봉(奉)씨 였다. 여자에게 관심 없는 문종이 봉 씨라고 달라질 리가 없었다. 세자가 찾아 들지 않자 봉 씨는 소쌍 이라는 무수리와 동성연애를 하다가 세종 비 소헌왕후에게 발각되어 역시 폐출 당하고 말았다. 수많은 규수들 중에서 뽑아드린 간택녀도 불미한 사건으로 쫓겨나자 이번에는 후궁 권씨를 세 번째 세자빈으로 드렸는데 이분이 후일에 현덕왕후로 추종된 분이다. 그러자 비로서 소생이 있어, 경혜공주에 이어 단종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단종이 태어나고 3일만에 산후 병으로 산모가 사망하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이 없게 되었다. 문종은 현덕왕후를 마지막으로 임금이 된 후에도 새 장가를 들지 않고 살다가 홀아비 임금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자를 맞아 들이면 제대로 간수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문종에게는 그런 소양이 부족했던 것이다. 궁궐 안에는 왕비나 대비, 공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궁녀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다. 대부분의 궁녀들은 한참 젊은 나이에 임금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 여러 가지 사고, 사건이 생기게 마련이다. 왕비는 이들 궁녀들을 감독하고 지휘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 그래서 궁녀들의 우두머리인 상궁들이 교태전 주위에 처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궁녀는 직책에 따라 임금, 왕비, 대비, 후궁 들을 지척에서 모시는 지밀궁녀, 바느질을 맡은 침방궁녀, 수를 놓는 수방궁녀, 부엌일을 맡은 소주방 궁녀 등이 있는데 소주방 궁녀는 상인 계급에서 뽑아 오지만 나머지 지밀, 침방, 수방 궁녀는 중인 계급 이상에서 뽑아 온다. 궁녀는 왕을 모셔야 하고 무엇보다도 왕의 여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선출 조건이 까다로웠다. 선조 중에 역적이 없어야 하고 가족 중에 중병이 없어야 했다. 조선조 초기에는 관청의 여종이나 기생의 소생들을 뽑았지만 점차 양가집 규수들을 궁녀로 선발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딸을 궁중에 들여 보내지 않으려고 조혼의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4살의 어린 나이에 견습시키는 지밀나인의 경우 외에는 6~13살에 뽑혀 들어와 견습 나인이 되는데 이때부터 15년 동안 궁중법도를 배우고 한글, 천자문, 대학, 소학 등 여러 가지 교양 공부를 곁들여 하게 된다. 견습에서 15년 정도 지나면 관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이 된다. 관례는 혼례를 치르는 것처럼 연지, 곤지 찍고 원삼당의를 입고 임금과 대비, 왕비에게 배례하는데 이것으로 궁녀는 임금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 궁녀가 되면 죽기 전에 궁을 나올 때까지 임금 외의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거나 혼인을 할 수 없게 된다. 나인으로 15년을 경과 하면 상궁이 되는데 상궁의 제일 우두머리인 제조상궁은 정 5품의 높은 관직을 받게 된다. 나인은 종 9품 관직에서부터 계급이 올라간다. 보통 궁녀라고 하면 상궁, 나인을 말하지만 그 아래로 하역을 맡은 무수리, 비자, 의녀 등의 천민출신들이있다. 물론 벼슬품계도 없다. 궁녀들의 유일한 꿈은 임금의 승은을 입는 것이다. 대개 나인으로 있다가 임금과 잠자리를 함께하면 그 다음날로 나인에서 승은 상궁으로 승진해서 하룻밤 사이에 시중을 드는 사람에서 시중을 받는 입장으로 대우가 달라진다. 만약에 왕의 자녀를 생산하면 종 4품 숙원에서 정 1품 빈까지 고속 출세 할 수 있다. 그러나 600여명의 수많은 궁녀들 중에서 왕의 눈에 드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민출신으로 막일을 담당하던 무수리의 신분으로도 출세한 분이 있다. 숙종의 총애를 입고 영조대왕을 낳은 숙빈 최씨다. 후일에 영조 대왕이 육상궁 이라는 숙빈의 사당을 지금 종로구 궁정동 1번지. 바로 지금 청와대 자리에 모시게 되었다. 조선시대는 적장자 상속제로 왕의 후계자는 원칙적으로 왕비에게서 태어난 소생이어야 하지만 왕이나 왕비의 소생이 아니면서도 왕이 된 분들이 여러 명이 있다. 이 경우에 왕은 왕이나 왕비가 아니었던 자신의 생부와 생모를 위해 특별한 예우를 해주었는데 생부는 대원군이라는 특별칭호로 호칭하고 생모는 사후에 사당을 숙빈의 사당이 있는 육상궁 옆에 모시는 것이었다. 숙빈 최씨를 필두로,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조선조 마지막 왕 영친왕의 어머니 순빈 엄씨등 6분을 더하여 그분들의 사당이 청와대 서남쪽에 있는 칠궁(七宮)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 칠궁이 있기 때문에 이곳을 궁정동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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