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8 : 사정전(思政殿) |
보스톤코리아 2010-04-26, 11:50:02 |
사정전을 기록에는 시사지소(視事之所)라고 불렀다. 시사지소란 임금이 여러 가지 나랏일을 처리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근정전이 외국사신을 맞이하거나 국가 행사를 치르는 곳이라면 사정전은 임금과 신하들이 회의를 하거나 관리 임명과 같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편전(便殿)이라 할 수 있는 국왕의 공식 집무실이다. 사정전에서는 매일 아침마다 종 6품 이상의 문무 관원들과 종친, 부마들이 참석해서 임금을 뵙고 정사를 보고하고 상의하는 조회 의식으로, 지금의 확대 국무회의와 같은 정무 회의가 열렸는데 이것을 상참(常參)이라고 불렀다. 정삼품인 통훈대부부터 종6품까지의 관리를 참상관이라고 부른 이유는 상참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관리라는 뜻이다. 이조 역대 임금 중에는 세종대왕만큼 상참에 열심히 참석한 임금이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자 임금의 건강을 걱정한 우의정 유관(柳寬)이 상참을 이틀에 한번씩 할 것을 제안했다. 세종의 답변이 이러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노라. 경이 나이가 많이 들어 상참 때문에 매일 아침 궁궐에 들어오다가 탈이 날까 나도 걱정되니, 다음부터는 상참에 참여하지 말고 집에서 쉬도록 하라.” 어진 임금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주는 우의정에게 핀잔까지 주고 있다. 왜 그랬을까? 세종대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철학은 임금과 관리들이 게으르면 백성들이 힘들어 진다고 믿는 임금이었다. 그래서 세종 년간의 대신 들은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고 한다. 여진을 정벌하고 육진을 설치한 김종서의 경우는 임금의 혹사를 피해서 여진정벌을 자원한 경우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반포하는 날 막상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집현전 학사들 중 반포에 참석한 인원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모두 과로에 지쳐서 와병 중이었다. 정인지의 경우는 모친상을 당해, 3년 상을 핑계로 관직을 사퇴했지만 세종대왕은 법령을 고쳐가면서까지 3년 상의 의무를 폐지하고 정인지를 잡아 두고 있다. 신하들을 이렇게 많이 부려대니 임금 자신이 더 많은 일을 떠맡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지금으로 말하면 아침 4시에 깨어나서 밤 11시까지 계속 정사를 보살폈을뿐만 아니라 6명의 비빈에게서 무려 22명의 자손을 두고 있다. 밤낮으로 몹시 바쁜 임금이었다. 그래서 53세의 젊은 연세에 돌아가신 것이다. 역대 왕 중에서 세종대왕을 빼고는 성종과 정조 두 임금이 상참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사정전에서는 상참을 끝낸 후에는 대개 경연(經筵)으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각종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교재로 임금과 신하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해서 실제로 정사에 적용하는, 유교의 이상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는 빗나갈 수 있는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실제로 정조(正祖)는 경연에서 신하들이 왕의 잘못을 지적하면 귀담아 듣고 시정했던 임금이었다. 세종과 성종은 하루에 한번으로는 속이 차지 않아 하루에 3번씩이나 경연을 연 임금으로 유명하다. 역시 좋은 임금은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던 점이 여타의 임금과는 차이가 나는 점이다. 세조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됐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결함이 많아 명분과 도덕을 앞세우는 경연에 참석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연산군의 경우는 주색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경연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이 역겨워서 아예 경연을 폐지 시켜버렸다. 한말의 고종 황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경연에 열심히 참석했던 임금이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임금으로 즉위해서 처음으로 용상에 앉았을 때 제일 먼저 영부사 정원용(鄭元容)이 충언하기를 “정사를 잘하고 백성들이 잘사는 것은 모두 임금이 공부를 하는가, 안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전하가 명철하고 슬기로운 것이 타고난 천품이라 하더라도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천품을 완성하여 정사의 묘리에 익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는 보령이 유충하시어 필경 경서와 사서중에도 읽지 못하신 책이 많을 것이옵니다. 지금이야말로 공부에 주력하셔야 할 때이옵니다.” 왕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소양을 갖추라는 말이다. 어찌되었든 고종 황제는 경연에서 열심히 공부하셔서 아주 많은 진취가 있었던 걸로 알려져 오고 있다. 실제로 고종에게 어려웠던 것은 12살 때까지 자유분방했던 궁 밖의 생활에서 갑자기 궁궐의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 언어와 습관 등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궁중에서는 홍합을 동해부인(東海夫人)으로 부른다. 그 이유는독자들이 이해할 것이다. 만약에 홍합으로 불렀다면 경연에서 수많은 신하들의 질타를 받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실제로 고종황제께서는 동해부인으로 부르는 데 적응을 잘 못하셨다고 한다. 사정전은 1층의 월대 위에 세워진 전각인데 정면에서 보면 맞은 쪽에 임금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예의 일월오봉도가 둘러서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용 2마리가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는 운룡(雲龍)도가 있다. 여기서 두 마리의 용은 임금과 왕비를 일컫고 구름은 신하들을 의미하고 있다. 중국의 역경에 “구름은 용을 따르며 용은 기운을 내뿜어 구름을 이룬다.” 라는 말이 있다. 구름이 없는 곳에 있는 용은 의미가 없다. 용이 없는 구름은 그냥 구름일 뿐이다. 용과 구름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왕과 신하가 서로 힘을 합쳐야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다는 주문이 담긴 그림이다. 사정전의 동쪽에는 만춘전이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다. 사정전에는 온돌 시설이 없기 때문에 추운 겨울에는 왕이 편전을 온돌시설이 있는 만추전이나 천추전으로 옮겨 앉곤 하였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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