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에 깃든 우리 역사 3 |
보스톤코리아 2010-03-15, 12:33:00 |
경복궁의 남문(南門)으로 궁(宮)의 정문(正門)인 광화문을 태조때 처음 건립했을 때는 정도전이 오문(午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문을 닫으면 이상한 말과 부정한 백성을 막고 이 문을 열면 사방의 어진아를 오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세종대왕 때 지금처럼 광화문으로 이름이 바뀌는데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化及萬方) 즉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널리 만방에 보여준다.” 에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시대 궁궐 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의 형식을 갖춘 문이다. 석축 위에 나무로 2층의 문루를 세운 중층 건물이다. 석축에는 세개의 무지개 문을 냈는데 가운데 문이 더 높은 문으로 임금과 왕비만 드나들수 있는 어문(御門)이고 동쪽문은 문관들이, 서쪽들은 무관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어문으로 들어가는 천장에는 남쪽의 수호신인 주작이 그려져 있어 이 문이 남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동쪽문 천장에는 구름속에 천마(天馬)가 그려져 있고 서쪽문 천장에는 거북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행여 나쁜놈이 경복궁 안으로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망을 보고 있다. 그런데 딱 한놈이 왕도 아니면서 가운데 어문을 통해서 드나들었던 놈이 있었다. 가마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말이다. 그 뿐 아니라 고종 황제에게 호통을 치고, 임금의 수라상을 걷어차는가 하면, 고종 황제와 독대 중에 주먹질까지 할 뻔했다는 몹쓸놈이었다. 갑오 경장 때 개화파 인사들을 죽이고,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무력 개입을 하면서 감국대신(조선 감독관 이란 뜻)으로 조선에 부임해서 흥선 대원군을 잡아간 원세개(袁世凱)란 놈이다. 결국은 몰상식한 행동을 계속 해대는 통에 양국간에 외교 문제를 야기시킨 친구다. 갑신 정변과 임오군란 때 고종황제를 도와 준 것을 빌미로 자세를 부린 것이다.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당한 수모일 것이다. 임오군란 전에는 우리나라에 겨우 3명 뿐이던 화교가 갑신정변 이듬해에는 300명을 넘어 2천 명까지 급증한 것은 원세개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장 교대식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고종황제 때 재건하였다. 일본 강점기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독 때에 경복궁의 수많은 건물들이 해체되고, 특히 흥례문도 철거 되어 그 터에 조선침략의 권부인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 서면서 광화문도 헐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바로 그 때에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경성제국 대학 철학과 교수로 있었던 아베 요시시게(安倍能成) 두 사람이 조선 문화 유산을 훼손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자 철거를 철회하고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이전했다. 6.25 동란 중에 포화에 맞아 망가져 버렸는데 박정희 대통령 때 다시 복원 시켰으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라고 다시 목재 건물로 복원 중인데 2010년 말에 완성될 예정이다. 원래 경복궁은 정문인 광화문, 중문(中門)인 흥례문(興禮門), 근정문, 정궁인 근정전, 편전인 사정전과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 교태전이 일직선으로 서 있으면서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도록 건축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총독부 건물을 근정전보다 폭을 넓게 지어서 앞에서 보면 근정전이 일절 보이지 못하게 하고 방향도 관악산이 아니라 남산쪽으로 틀어 버렸다. 남산에는 일본건국 신화와 주신(主神)인 천조대신(天照大神)과 1912년에 죽은 명치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신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동남쪽에 외롭게 서 있는 망루는 동십자각으로 원래가 경복궁 담에 붙어 있던 망루였는데 광화문을 이전하고 길을 내었기 때문에 경복궁 담에서 떨어져 홀로 서 있는 것이다. 흥례문 (興禮門) 정문인 광화문을 지나 정전(正殿)인 근정전에 가려면 중문인 흥례문과 마지막 문인 근정문을 지나야만 한다. 홍례문(弘禮門)의 원래 이름은 “널리 예를 편다는” 뜻을 가진 홍례문(弘禮門)이었다. 그런데 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이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홍 대신에 흥을 넣어 흥례문(興禮門)이 된 것이다.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헐리게 되지만 1995년에 월드컵 행사가 한국에서 열릴 때 흥례문을 복원하고 전통의 궁중 문화 행사인 수문장 교대 행사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같이 오후2시부터 3시반 사이에 흥례문 앞 광장에서 수문장 교대 행사를 벌이는데 아주 더운 7월 28일부터 8월 2일 사이와 영하 5도 이하의 날씨에는 열리지 않는다. 흥례문과 수문장 교대식 조선에서 수문장 제도가 처음으로 시작된 때는 예종 1년(1469) 때부터였다. 4품 이상의 무관 중에 추천된 후보자 중 국왕이 23명을 임명한다. 조선시대에는 궁성문을 열고 닫는 것을 남대문이나 동대문 같은 도성의 성문보다 늦게 열고 일찍 닫았다. 도성문은 파루(오전 4시경)에 열고 인정(오후10시경)에 닫았는데 궁성문은 해가 뜰 때(평명: 보통 오전 5시)에 열고 해가 질 때(보통은 오후 6시경)에 닫았다. 궁성문은 수문장이 단독으로 여닫는 것이 아니고 승정원과 도총부의 관리와 수문장 3자가 모여야만 궁문을 여닫을 수 있었다. 수문장 교대식은 당시 무관들의 복장과 무기 깃발을 들고 취타군의 행진곡에 따라 교대할 수문 군사들이 등장하면서 당직 수문관과의 교대할 절차를 행하는 것이다. 볼만한 구경거리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람하는데 외국인들이 원더풀을 연발하면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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