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생 선교 나선 가수출신 기러기 엄마 목사 |
보스톤코리아 2010-01-25, 11:34:00 |
며칠 후 같이 사무실을 방문한 같은 교회 최언집 전도사의 제안으로 점심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직선적이고 털털한 성격을 순식간에 느낄 수 있었다. 약간 진한 향수 내음에 평범치 않은 인생 뒷배경도 쉬이 맡아졌다. 이야기하기 편한 상대여서 스스럼없는 질문을 던졌고, 생명수 열방교회 차 목사는 개의치 않고 약간은 ‘목사답지 않은 말투’로 술술 자신의 이야기를 회고 했다. 짧은 식사 시간이었기에 자세한 인터뷰는 이메일로 미뤘다. 명함을 받았을 때 일본이름 이어서 혹 재일 교포인가 했습니다. 일본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저는 1980년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일본국적을 취득했습니다. 현재 남편은 일본 동경 아까사까에 로펌을 가지고 있는 변호사 입니다 보스톤에는 언제 왔으며 지금까지는 어떤 일들을 해오셨나요? 보스톤에는2008년 2월에 왔습니다. 제 딸이 9학년 중간에 내틱에 있는 월넛힐 하이스쿨 에 유학하게 되어서 아이를 챙겨주려고 오게 됐습니다. 주말에 집으로 데려와서 공부를 시킬 요량으로 아파트를 얻었습니다. 한 일년 반은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아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세월만 죽였습니다 아는 집사님의 소개로 한목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저희 집에서도 교회가 가깝고 해서 그 교회의 협동목사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교회를 따로 개척한 이유가 있나요? 교회가 니드햄에 있었는데 그곳은 거리상으로 멀어서 학생 사역 하기에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저는 학생사역을 원하기 때문에 부득이 버클리 학교 근처에 교회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또한 같이 사역하던 담임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 부임하셨기에 그것도 계기가 됐습니다. 이 교회를 통해 일본 학생 선교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협동목사로 일하면서 학교까지 가서 큐티다 성경공부다 하면서 아이들과 깁밥, 떡볶이 등을 나누며 캠퍼스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버클리 대를 갈 때마다 일본학생들이 많아서 몆식사도 같이 하다보니 친해져서 교회까지 나오게 됐습니다. 기도를 하던중 주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일본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불타는 소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신앙과 한국인들의 신앙을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제가 일본에서 3년 목회를 했고 30년을 일본에서 살면서 보았지만 일본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혼레 와 다데마에’라는 일본말이 있읍니다. 속마음 과 겉으로 표현하는 말이 틀리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 데 정작 보면 아닐 때가 있고 믿음이 없는 것 같은데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은혜 받으면 뜨거워서 팔팔 뛰는데 그 사람들은 조용하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대단한 믿음일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 자체가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본 학생 선교를 표방하신다면 굳이 이렇게 한국 커뮤니티에 교회를 알릴 이유가 있나요? 일본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90% 이상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라는 그 자체를 거부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 병든 자, 약한 자 그런 사람들이 나가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구요. 낯가림 또한 심해 마음 문을 열려고 하지도 않지요.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하타(깃발) 민족이라고 할 정도로 누군가 리드만 잘하면 흉보면서도 잘 따라오는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믿음 있는 한국학생들이 리더가 되어서 그들을 양육하고 지도하면 훌륭한 크리스찬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학생들이 선두로 뛰어주고 리더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한국학생들이라고 다 예수 믿습니까? 한국학생들 또한 변화를 받아야지요. 그래서 부득이 한국 커뮤니티가 필요합니다. 처음부터 사역자의 길을 걷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저는 80년 3류 연예인으로 일본에 갔습니다. 노래하는 가수로 일본에 가서 유흥 업소에 종사하게 됐지요. 그러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본부인이 아닌 두번째의 가정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는 많은 한국 여성들이 두번째 부인으로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었습니다. 교회에는 술집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70% 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80년도 일본에 가자마자 예수를 영접하고 동경 순복음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이 되었지요. 그러나 믿음이 없었고 교회에서는 그것이 죄라고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고 헌금도 많이 내는, 그런 나름 열심이었지만 정작 무엇이 죄인지 조차 모르는 그런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 한 목사님의 부흥회 설교 테이프 하나가 저를 깨트렸습니다. 당시 제가 두번째 부인으로 사는 것이 죄악이요,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저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했고 남편은 6개월만 기다리면 본처와 이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정을 깨트릴 수 없는 저는 다 버리고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3살짜리 딸과 같이 하와이에 도착하는 날부터 복음 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집 문앞에서 ‘나는 얼마 전 만해도 첩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예요, 주님을 믿고 거듭났어요’하며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질도 받았고, 대단한 믿음이라 따라주는 이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 둘 모여 저희 집이 교회가 됐습니다. 6개월이 지나니 리빙 룸에 45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어요. 신학교도 안 나온 평신도인 저가 예배를 리더했고, 그 때부터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 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 6개월이 지나 교회를 하나 세우고 저는 시애틀 타코마라는 곳으로 가게 됐습니다. 교회를 세운지 얼마되지 않아 시애틀 타코마로 떠났는데 타코마에 간 이유가 있나요? 교회의 면모가 갖춰지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목사님을 초청했습니다. 기도 중에 주님께서 ‘너의 할 일은 끝났다 여기서 떠나라’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보스톤으로 오려고 기도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저에게 타코마로 가라고 음성으로 정확하게 들려 주셨습니다.처음에 제가 타코마로 간다고 하니 사람들이 다들 말리더군요. 그런데 정작 지금 생각하면 제가 타코마라는 곳에 가지 않았다면 결단코 지금의 나는 없었습니다. 하와이는 관광도시라 모든 것이 저에게는 익숙한 곳이지요. 그러나 타코마는 달랐습니다.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가난하더군요. 물론 조금 부유한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저소득이요 군인 가족이 많았습니다. 20불이 없어서 한국마켓에 못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루에 3곳에서 일을 하면서도 흑인 남편에게 매를 맞고 사는 분도 계시더군요. 참혹한 현실을 보면서 지난날에 하룻밤사이에 십만불을 날리는 노름을 하며 사치했던 일들을 얼마나 회개 했는지 모릅니다. 정말 타코마에서는 구제하며, 전도하며, 기도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게중에도 시기,질투와 무시가 있어 많은 세월을 핍박과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선하고 착한 사람도 많지만 악하고 거센 사람도 많았습니다. 3년반 이란 세월 동안 가정교회를 세우고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동안 애기 아빠는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15,000불이라는 생활비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복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비자로 인해 3달에 한 번씩 한국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한번은 한국에 다녀오다가 시애틀 공항에서 일본으로 쫓겨 났습니다. 너무 출입이 잦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일본에 돌아가 보니 애기 아빠는 남의 빚 보증 을 서서 알거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부인에게 이혼까지 당하고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남편과 혼인 신고를 하고 정식 부인이 되었고 딸도 아빠의 호적에 올라갔습니다. 4년 전에 남편이 이혼한다고 했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제가 가정을 빼았았다면 저는 평생 가정 파괴범이요 평생 죄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4년반 동안 저를 미국으로 보내 일본에서 살던 사치와 허영과 악 습관을 바꾸시고 복음 전하게 하시고 새롭게 가정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결혼 후 남편에게 도움을 주었는지요? 남편도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교회에 나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 다음날 월요일에 길에 지나가다가 옛날 손님을 만났습니다. 그 손님은 ‘선생님 같은 분이 신문과 T V 에 난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세한 내막을 듣고 싶다고 하더랍니다 남의 빚 보증을 잘못 서서 그렇게 됐다고 자세히 이야기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어느 회사 회장인데 자기네 회사 고문 변호사를 다시 맡아 달라며 그 자리에서 선뜻 10만불을 주었답니다. 사무실을 다시 열게 되었고 저희도 집을 얻고 안정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간 그 다음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체험한 것이지요. 그 이후로 남편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40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을 다시 개업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140평 이 넘는 큰 사무실에 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로펌 회사가 됐답니다. 아까사까라는 지역은 40평의 렌트비가 6천불 이었읍니다. 지금의 사무실은 미국대사관 바로 앞이라 아마도 평당 조금 더 비쌀 것입니다. 자칭 ‘밥해주는 목사님’이라고 했는데, 신앙에 호소하기 보다는 신앙 외적인 요소로 학생들에게 다가 간다는 비난은 없었나요? 네, 사람이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한국인사는 아침 식사하셨어요? 그러지요. 한국 카이스트 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한 학생이 돌아가면서 “저에게 목사님 제 지갑은 비어있었지만 배는 매일 목사님 덕분에 꽉 찼습니다. 행복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예수 열심히 믿고 목사님 말씀대로 남을 위해 나의 지식을 사용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은 음식에 있읍니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마음 문이 열리지요. 지금은 연변 과기대에 교수로 계신 정진호 선교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보스톤에 처음 와서 교회를 나가게 된 동기가 바베큐 파티에 가자고 해서 따라간 것이랍니다. 그러다가 예수를 믿게 되어 저렇게 큰 일을 하는 선교사가 되어서 많은 학생들의 인생을 바꾸고 있지요. 저는 매주 수, 목 브리지워터 칼리지 라는 곳을 학생들 밥을 먹이러 갑니다. 그곳에는 일본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 에 학생들에게 돼지 불고기를 구워서 한국음식과 미국음식을 학생들에게 제공합니다. 저는 밥만 못 주니까 성경공부하면 밥 준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학생들이 온다고 선뜻 나서지를 않더군요. 그런데 그주 목요일에 스끼야끼 파티를 한다고 하니까 일본학생들이 15명이 모이더군요. 그것이 음식의 파워 입니다. 정작 예수님도 항상 복음전하고 5병2어의 기적으로 먹이시고. 채워주셨지요. 목사님께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의 목표는 제2 제3의 정진호 선교사 같은 분들이 한국학생이나 일본학생들속에서 나오길 기대합니다. 세계의 리더20%가 보스톤 출신 이라고 하더군요. 한 학생이 변화 받아서 본국에 돌아가 만약에 교수가 됬다 가정을 한다면 그교수로 인해서 학생들이 변화 받을 것이요 .. 버클리 음대 출신이 변화 받아서 한국이나 일본의 연예계 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가정을 한다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대단한 지지도 가 있으리라 봅니다. ‘교회를 부흥 시켜서 큰 교회를 만들어서 보스톤에서 유명해 지자’이런 마음은 추호도 없읍니다. 오직 영혼 한사람 한사람 에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보스톤에서 작은 핵폭탄 예수그리스도 폭탄 제조공장을 하고 싶읍니다 그들이 본국에 돌아가 스스로 터져만 준다면 많은 영혼들이 변화받을수 있는 큰 일을 할수 있겠죠 ..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목사님들은 너무나 많지요. 굳이 꼽으시라면 은혜한인 교회처럼 선교하는 교회. 그러나 제가 목표로 삼고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는 교회가 인력과 재정만 갖춰 준다면 세계를 무대삼아 복음을 전하는 세게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보스톤에서도 세계 의 언어로 예배를 드릴수 있는 그렇한 교회를 꿈꾸고 있읍니다. 지금 역시도 브라질 교회와 협력하여 포루투칼 스페니쉬 예배가 현재 저녁시간에 예배를 드리니까 가능성 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브라질 교회담임 목사님도 여자분 입니다 그래서 같은 순복음 출신들이라 잘 통하고 잘 협력하고 있습니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의견목록 [의견수 : 1] |
binlex | |
무대를 세계로 삼아 세계언어로 예배드리고 선교사를 파송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믿으며 많은 기도 드립니다. 지면으로 나마 축하드립니다. 이 영미 | |
IP : 75.xxx.7.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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