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0피트(1,602미터)의 설원에서 만난 거센 바람
보스톤코리아  2010-01-11, 14:48:33 
겨울 산행, 조금은 겁나기도 해서 주저하기 쉽지만 준비된 사람들에겐 설경에 빠져 설원 위에 거세게 불어대는 차디찬 바람을 맞으며 하는 설국여행의 최고의 매력이다. 그래서 산과 친하게 사는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산 모두를 좋아하지만, 특히 겨울 산을 좋아하는 것 같다.

몇 주 전 산사랑 회원이신 징검다리님(닉네임, 뉴잉글랜드 산사랑에서는 실명보다 닉네임을 주로 사용함)으로부터 연말에 틈이 나니 겨울 번개(한 달에 두 번 있는 정기 산행 말고 수시로 하는 산행을 말함)를 한 번 하자는 제안에 따라서, 우리는 비록 수은주는 많이 떨어질 것이지만 맑은 날로 예보되는 이 날을 정하였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가슴 설레며 이 날을 기다리며 매일 하늘을 살피며, 해와 달과 별들의 뜨고 짐을 유심히 관찰한다. 이 일은 아마 산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받은 선물과 축복이리라.

산행 당일 직전 날, 내가 사는 곳(Andover)에는 하루 종일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람이 어느 정도 줄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밖에 나와 본다. 바람소리가 쌩쌩하다. 그러나 내일이 보름이라 달은 매우 둥글었고, 총총한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징검다리님을 태우고 기분 좋게 달려간다. 그러나 I-93, Exit25(Plymouth, NH)에 이르기까지 비록 나지막하긴 하지만 순백의 옷을 입고 있어야 할 정상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실망감이 앞선다.

그러나 Exit26을 지나자 저 멀리 높게 솟아있는 봉우리가 하얀 눈을 온통 뒤집어쓰고 대서양을 힘차게 뚫고 나온 태양 빛을 받아 찬란한 광채를 유감없이 발하고 있었다. 탄성과 함께 마음속으로 그 이름들을 불러본다. 좌로부터 Mt. Moosilauke(4,802ft.), Mt. S. Kinsman(4,358ft.), Mt. N. Kinsman(4,293ft.), 그리고 Cannon Mtn(4,100ft.), 오늘 우리가 오를 Mt. Lafayette과 Franconia Ridge는 가리어져 보이지 않았지만, 오른쪽으로는 눈앞으로 다가온 Mt. N. Tripyramid(4,180ft.), Mt. Middle Tripyramid(4,140ft.), 그리고 South Peak(4,100ft.)이다. 마침내 Franconia Notch State Park(I-93 Exit34A,B,C, 35구간)에 이르니 Mt. Flume, Liberty, Lincoln, 그리고 Lafayette이 아주 가까이서 우리를 지켜보며 환하게 반겨 맞는다.

들머리에 닿으니 이미 여러 차량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출발하고 혹은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추운 날, 겨울 산행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선다는 것이 서로 위안이 된다. 눈이 산에 쌓이기 시작하면 바람으로 높은 곳은 낮아지고, 고르지 않은 곳은 평탄하게 되고, 험한 곳은 평지가 된다. 그리고 눈길은 얼음 빙판 길로 변하지 않는 이상 그 큐션이 양탄자 같아 무릎에 충격을 주지 않아 그만이다. 그러나 오늘 초반에 걷는 길은 이러한 환상의 길은 아니었다. 아직은 이른듯하였다. 우리는 선발대들이 Snow Shows로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 미끄러지면서 더러는 빠지기도 하면서 한 시간을 한참 넘도록 걸었다.

드디어 열린 능선에 붙었다. 바로 눈앞에 오늘 우리를 초대해준 Lafayette, Lincoln, Little Haystack이 나타났다.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미 예정된 시간보다 많이 지체 되었고, 앞으로의 능선 길도 평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Lafayette만이라도 오를 수는 있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오르고 또 올랐다. 4,220피트 명당자리에 세워진 Greenleaf Hut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45분이다. 야속하게도 문은 단단하게 잠겨 져 있었고, 양지 바르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는 앞서 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바람을 피할 곳을 찾아 그곳에서 허기진 배를 우선 달랬다. 찬 유부초밥이었지만 징검다리님의 두 남매가 아버지의 오늘 산행을 위해 응원을 보내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라 그런지 맛이 특별했고 힘이 더욱 솟는 것 같았다. 물론 배낭에 있던 물은 얼음 반 물 반이 되어 있었다. 버너를 준비하긴 했지만 불을 피울 여건은 전혀 아니었다.

크고 작든 완전한 등산을 위한 원칙 가운데는 자기의 에너지 30%를 오를 때, 40%는 하산 할 때, 그리고 30%는 내려와서도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있다. 1.1마일 떨어져 있는 순백의 Lafayette 정상을 빤히 바라보면서 저곳을 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평상시 같으면 40분에서 1시간 거리인데 오늘 여기까지 올라 온 시간으로 보면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오고, 바람과 추위로 체력을 더욱 소모할 것까지 셈에 넣으면 정상에 서려는 것은 욕심인 것 같았다. 욕심은 사고와 연결되고, 사고는 항상 하산 시에 발생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 아파졌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결국 오후 1시가 되는 지점이나, 알파인 지대(Alpine Zone, 고산지대)를 넘어 나무가 없는 지점(above tree line) 중 먼저 이른 곳에서 하산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결정한 것이 얼마나 잘한 것인가!!! 무장을 새롭게 하고 출발하자마자 우리는 하얀 눈꽃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두른 나무 터널을 통과하였다. 요즈음 건강식이 색깔을 먹는 것이라고 하더니, 오늘 우리는 때 묻지 않은 순 하얀 색깔에 묻혀 미쳐가기 시작한다.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눈을 얹고도 바람을 막아주고 그 소리까지 흡수해주므로 평화로움을 주는 나무여, 네가 진정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리라! 아! 나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우리 둘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실험하며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걸었다.

알파인 존을 지났고, 온몸을 설원 위에, 거센 바람에 완전 노출해야 하는 나무 한그루 없는 지점에 다 달았다. 우리 둘 중에 누구 하나 시간을 묻거나 어디까지 갈 것이냐?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상에서 우리를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 말 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외면한다면 죄짓는 것과 다름없었다. 정상 직전 0.1마일 지점에 있는 큰 바위를 끼고 도는 급한 경사면은 겨울 산행의 최고의 난코스 중에 하나로 알려진 곳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왔다가 아깝게도 되돌아가곤 하는 곳이다. 우리가 이곳을 어떻게 통과하였는가? 꿈만 같다. 임에게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해야만 가능하다.

마침내 정상에 섰다. 눈꽃과 상고대가 겹쳐 바위들마다, 그리고 이정표지판을 태고의 모습으로 신비롭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설경 중에 설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5분이다. 그렇다면 Hut에서 출발한지 40분이 걸린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어림잡아 지금까지 15회 이상을 이곳에 올라 나는 늘 나와 함께 하는 그분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고, 웃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어떤 때 보다 더한 감격과 감동의 눈물이 앞선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저 멀리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Mt.Washington(6,288ft., 1,917m)을 바라보며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바로 하산이다. 방향을 틀자마자 난생 처음 맞아보는 것 같은 거센 바람이 어름 가루가 되어버린 눈과 함께 사정없이 얼굴을 강타하며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몰아친다. 그때서야 우리가 이곳을 생각보다 쉽게 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바람이 우리를 등 뒤에서 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완전히 압도하는 바람을 안고 뒷걸음으로, 지그재그로 발을 떼기 시작한다. 길은 물론 앞서 갔던 사람들의 발자취도 휘날리는 눈으로 인해 알 수가 없다. 그런데 5,260피트의 설원에서 만난 거세고 거친, 차고도 찬바람이 싫지 않았다. 우리는 그 바람이 쉘리가 노래한 "서풍(西風)" 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쉘리의 서풍은 파괴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존하는 자이다. 늦은 가을에 죽은 잎사귀들을 날려 버릴 때에는 파괴자, 그러나 생명의 씨앗을 겨울 대지 속에 깊이 묻히게 하고 마침내 그 누이인 봄바람에 그 바톤을 넘겨주어 들과 산으로 생동하는 색깔과 향내로 가득하게 할 때는 보존자라는 것이다.

아! Lafayette 설원에서 만난 이 서풍은 하늬(하늘) 바람이 되어 내 안에 있는 유혹의 욕심으로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려는 옛사람을 사정없이 벗겨주고, 겨울 대지 같은 내 가슴 속에 생명과 자유와 진리와 사랑의 씨앗을 심겨주어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달라고 뜨거운 가슴과 입술로 기도드린다.

아! 향내 나는 서풍이여, 하늘 바람이여.

이내 두려움은 사라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더니 훨훨 날아 출발한 곳에 이른다. 오후 3시 5분이다. 들머리를 출발한지 6시간 10분이 지났다. 꿈의 여행을 마치고 정상적 삶으로 돌아오니 생기나 넘쳐난다. 뜻밖에 송구영신의 산행으로 귀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김광식(뉴잉글랜드 산사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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