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30 |
보스톤코리아 2009-11-16, 15:35:10 |
고선지 장군은 서기 756년 초에 진중에서 처형되었다. 고선지 장군이 없는 당나라의 관군은 전의를 잃고 반란군에 쫒기다가 서기 756년 6월에 기어이 장안 도성의 반란군에 의하여 함락되고 말았다.
안록산은 스스로 황제임을 자칭하고 황궁에 입성했다. 당현종은 애처 양귀비를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산서성 촉당으로 피난갔다. 세상은 전쟁으로 온통 수라장이 되고 피난민은 남부 여대로 큰길을 메우고 국토는 완전히 황패해 졌다. 국파 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망하고 산하만 있네. 성춘 초목심(城春草木沈) 성내의 봄은 초목만 깊고 감시화천루(感時花賤淚 ) 슬픈 세상 생각하니 꽃 마저 눈물 지누나 한별조경심(閒別鳥驚心) 한 많은 이별에 가슴 조이며 봉화 연삼월(烽火連三月) 봉화는 석달째 계속 오르고 가서 저만금(家書抵萬金) 집에서 보낸 편지는 천만금 같다. 백두 소갱단(白頭搔更短) 흰머리는 긁어서 더 짧아져 혼욕 불승잠(渾欲不勝簪) 이제는 비녀도 이기지 못하는구나. 두보의 5언절구 명시이다.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아시다시피 두보는 인생의 슬픔과 나라가 허망하게 되어가는 것을 보고 노래로 호소한 당대(唐代) 최고의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보다시피 배가 고파 쪼르륵 쪼르륵 소리가 나고 병이 들어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 아름다운 시상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두보 (712~770)는 산동지방의 말단관리인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무척 가난하였고 학문이 높은데도 줄이 닿지 않아 출세의 길이 신통치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안록산의 난을 당하여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때로는 배가 고파 다람쥐가 먹다 남은 도토리를 주워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슬픔과 나라의 흥망을 시작(詩作) 으로 달래면서 거리를 방황하다가 서기 770년 59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했다. 그런데 고선지 장군이 반란군의 안록산과 내통이 있었는지 아니면 부관이 질투로 모함하였는지 그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고선지 장군이 없는 당나라의 관군은 안록산의 반란군에 패퇴하다가 서기 756년 6월 도성장안이 함락되고 말았다. 당 현종 황제는 후궁 양귀비를 데리고 그녀의 고향인 서쪽인 촉당(사천성) 으로 피난 갔다. 그런데 도중 호위하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양귀비의 친정 족속들을 모두 처형하고 양귀비는 명주 수건으로 목을 메어 죽게 하였다. 당나라의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탐욕생활은 이로써 그 막이 내려졌다. 한편 안록산은 장안의 황성에 입성한 후 스스로 왕임을 자칭하다가 안경서에게 살해되고 만다. 당현종은 서기 756년 태자 영무 (후일의 숙종)에게 양위했다. 이때 안록산이 심복인 평로유후 서귀도(徐歸道)가 유성현의 경락판관 장원간(張元澗)을 발해국에 파견하여 전하기를 안록산을 칠 것이니 군사 4만 명을 내어 역적 타도에 나와 달라고 요청해왔다. 발해의 문왕은 서귀도가 딴 마음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안 문왕은 장원감을 강금하고 군사를 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귀도는 유주 절도사 사사명과 결탁하여 당나라를 공명하려고 공모하였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안동도호 왕현지(王玄志)가 정예군 6천 명을 이끌고 가 유성을 함락시킨 다음 평로 유후 서귀도를 잡아 죽였다. 반란군의 기세는 여기서 그 힘이 꺾이고 말았다. 757년 정월 안록산은 근친인 안경서(安경 緖)에게 살해 된다. 같은해 9월에 곽자의 장군이 반란군을 물리치고 서경(장안)을 회복했다. 아직 반란이 진압된 것이 아니다. 서기 758년 6월에 안록산의 심복인 유주 절도사 사사명(史思明)이 안록산을 대신하여 일어났다. 그리고 안록산을 살해한 안경서를 잡아 죽이고 스스로 연나라 왕임을 자칭했다. 절도사 사사명은 서기 761년 사조의(史朝義)에게 패하여 살해 되었다. <깨원의치>로 전성을 자랑하던 당나라는 10여 년에 걸친 <안사의 난>으로 쇠퇴의 길에 접어든다. 그런데 만일 발해의 문왕이 서귀도의 제안에 따라 군대를 동원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결과는 물으나 마나 당나라는 거기서 끝장이 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발해의 문왕은 서귀도의 요구를 물리치고 반란군에 협조하지 않았다. 발해의 협조를 얻지 못한 반란군은 그 세력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편 발해의 문왕이 서귀도의 요구를 거부한데 대한 보복으로 반란군이 먼저 발해를 공격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라 문왕은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것이라고 보아진다. 서기 761년 안동도호 왕현지(王玄志)가 부하 장군 왕진의(王進儀)를 발해국에 보내서 알리기를 “황제(숙종)께서 이미 장안에 환궁하셨고 촉당에 피난하셨던 태상황(현종)께서도 별궁으로 환어하셨습니다. 반란의 도당은 모두 소탕되었습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발해국의 문왕은 그의 말이 과연 사실인지 믿기가 어려워 일단 왕진의를 억류하고 따로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당나라의 숙종은 발해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그를 후히 대접하는 한편 따로 사신을 발해국에 보내 발해국의 문왕께서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데 대하여 감사하는 동시에 문왕을 발해국 왕으로 책봉하고 검교태위 (정1품) 로 지위를 높여 봉하는 조서를 보냈다. 한편 신라의 경덕왕은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당하여 매우 곤란한 지경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즉시 위로의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였다. 당나라로 간 신라의 사신은 당 현종께서 난을 피하여 촉땅으로 행차하셨다는 말을 듣고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城都)에 이르러 현종이 거처하는 행재소를 찾아가 아련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보낸 위로의 서찰을 받은 당나라 현종은 그에 대한 답례로 오언 십운시(五言十韻詩) 를 친히 지어 주었는데 그 시의 원문은 삼국사기의 경덕왕 편에 실려 있다. “비온 뒤에 땅이 굳는다” 고 안사의 난이 평정 된 후로 동양 3국인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발해가 평온을 되찾아 국교가 정상화 되면서 사신의 왕래가 빈번히 이루어졌다. 신라는 원성왕 6년(790) 북국(신라는 발해국을 북국 이라고 하였다.)에 사신을 처음 보냈다. 백린 (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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