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 상원의원, 그 파란만장한 삶 |
보스톤코리아 2009-08-27, 20:06:45 |
에드워드 케네디는 조셉 케네디와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 사이의 막내로 조지 워싱톤의 생일인 1932년 2월 22일 태어났다. 당시 커네티컷 쵸에트 하이스쿨에 다니던 형 잭은 자신이 대부가 되길 원했고 이름을 조지 워싱톤 케네디로 하자고 부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부모는 잭을 대부로 삼았지만 이름은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로 작명했다. 영국 대사를 지낸 아버지 조셉 케네디로 인해 케네디 상원의원은 런던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그는 1964년 밀튼 아카데미에 진학해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 그는 하버드에 진학 스페이니쉬 시험을 친구에게 대리로 보게 했다가 발각되어 쫓겨났다. 하버드는 충분한 미시민의 의무를 다한 증거를 보여야만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케네디 의원은 2년간 육군에 복무했다가 1956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 법대(University of Virginia Law School)를 졸업했다. 가족 이벤트에서 그는 조앤 베넷을 만나 58년 결혼했다. 케네디의원은 존의 상원재선 선거참모로서 활약했다. 1960년 존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성화는 새로운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넘어갔다”는 선언을 연설을 통해 발표했다. 1962년 30세가 되어 상원 출마 자격을 얻자 당시 주 검찰총장이었던 에드워드 맥코맥 주니어와 선거를 벌였다. 이 존 케네디 대통령 당선이후 보궐선거의 토론회에서 맥코맥 검찰총장은 “상원직은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재능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혹평했다. 그는 케네디 상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만약 나의 이름이 에드워드 무어이며 이러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면 아마 내가 후보로 나선 것은 웃음거리였을 것이다”고 비판했ㄷ. 케네디 의원이 이에 고통받는 모습으로 침묵을 지키자 많은 사람의 동정표를 얻었으며 결국 69%란 표를 획득해 예선을 통과했으며 본선에서는 조지 로지를 꺾고 상원에 당선됐다. 1964년 케네디 상원의원은 시민권 법안 투표를 마치고 MA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첫 6년 임기의 상원으로 인준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비행사와 보좌관은 사망했으며 케네디 의원도 심각한 부상을 당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6개월 후 회복됐으며 선거에서 승리했다. 형인 로버트 케네디는 뉴욕에서 상원으로 당선되어 형제가 같이 상원의원직을 수행키도 했다. 케네디 의원의 최대 고비는 여자문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의 휴가지인 마타스 빈야드 에드거타운에 있는 캐파퀴딕에서 케네디 상원은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실에서 일하는 6명의 여자들과 만났다. 케네디 상원의원의 결혼생활은 이미 문제가 잇는 상태에서 6명의 글래머들과 함께 섬에서 만난 것은 이미 문제를 더 깊게 만드느는 것이었다. 케네디 상원은 술이 취한 상태에서 매리 코패킨을 태우고 운전하다 차가 다리 밑으로 추락했음 결국 코패킨은 익사하고 말았다. 문제는 케네디 상원의원이 무려 10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 비록 몸에는 작은 상처만 입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고 말았다. 케네디는 1979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과 경선을 가졌다. 그는 카터 대통령과는 이념적으로 많은 다른 길을 걸었었다. 케네디는 출마선언 직전 CBS의 로저 머드와의 인터뷰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왜 출마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머뭇머뭇 거리며 “이 나라에 대한 위대한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인재를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첨단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별 신통치 않은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그에 대한 치명타는 채파퀴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질문. 그는 많이 연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에게 많은 반대감정을 일으켰고 이 같은 치명타를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1979년 11월 7일 그는 47세의 나이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지만 이어진 예비선거에서 35대 10으로 패했다. 그는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마지못해 카터에 대한 승인 연설을 전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아우르는 상원정치행보를 보였고 공화당 의원들은 선거기금 파티에 케네디의 이름을 사용할 정도로 공화당 의원들과의 공조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가 이처럼 반대편들과도 쉽게 공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본래적인 매력보다는 노력에 바탕을 둔 장인정신에 기인했으며, 감언이설보다는 그의 부지런함이 많은 역할을 했다고 미 언론은 평가했다. 버지니아 공화당 상원의원 존 와너는 “그는 정말 열심히 노력한다. 그가 한 주제에 대해 알고 싶어할 때는 정말 잘 파악한다. 그는 듣고, 배운다. 그는 정말 상원 위원회의 주요 자산이었다”고 평가했다고 보스톤 글로브는 밝혔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1982년 그의 첫번째 부인 조앤과 이혼할 때까지 안정을 찾지 못햇으나 1992년 이혼녀이자 22살연하인 빅토리아 레지와 결혼하면서 그의 삶에 집중하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94년 공화당의 득세로 인해 한때 케네디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는 미트 롬니 후보의 도전에 흔들렸으나 패뉴얼 홀의 토론회에서 그의 실력을 입증, 적은 차이로 승리를 거뒀다. 지난 1962년 이래 최소 표차였다. 미트 롬니는 추후 매사추세츠 주지사에 당선됐으며 지난 2008년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장명술 [email protected]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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