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24
보스톤코리아  2009-08-10, 12:58:27 
어쨌든 글 안의 이진충은 당나라의 영주도독 조문회를 살해하고 영주를 함락한 다음 스스로 상가한(上可汗;왕을 뜻함)이라 자칭하고 매부 손만영(孫萬榮)을 대장으로 삼아 요서일대의 중국인의 거점을 총 공격했다. 글안인들은 평시에는 부족별로 분산하여 유목생활을 하다가도 일단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면 총 동원하여 전투에 임한다. 이 때 이진충이 모은 군사가 10여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무서운 세력이 아닐 수 없다.

이진충은 그 세를 몰아 승주(崇州)를 공략하고 부사 허흠적(許欽寂)을 잡아 죽였다. 이 보고를 받은 당나라의 즉천무후는 크게 노하여 곧 응양장군 조인사(曹仁師)와 금오위 대장군 장현우(張玄遇) 그리고 사농소경 마인절(麻仁節)을 파견하여 이진충을 치게 했다. 그러나 당나라 군사는 황장곡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장현우와 마인절 그리고 많은 장수들이 포로 또는 전사했다.

이에 놀란 즉천무후는 우무위 대장군 무유이를 청변도 대총관에 임명하고 천하의 용사를 불러 모아 글안군을 치게 했다. 그러나 무유이 장군도 글안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청변도 부총관 장구절(長九節)이 수백명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글안군의 전후를 강타했다.

이 싸움에서 이진충이 살해되고 손만영영은 산으로 도망하여 겨우 그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신당서는 이진충이 살해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우무위 대장군 무유이가 개선했다. 즉천무후는 이진충을 살해했다는 보고를 받고 기뻐하면서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어 신공(神功) 이라고 개정했다. 이로 보건데 이진충의 반란이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이진충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것은 단지 영주도독 조문회가 방약무도하게 글안인을 압박하였다는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후의 전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원에 입성하는 것이 최후의 목표이었던 것 같다.

한편 산으로 도망했던 이진충의 매부 손만영 장군이 하산하여 사방에 흩어졌던 글안병들을 다시 수습하고, 별장 이해고와 노무정 그리고 하가소를 선봉장으로 하여 기주(冀州)를 공격, 자사육보적 (陸寶積)을 살해하고 수천명의 중국인을 약탈했다. 이후로 손만영은 이진충을 대신하여 글안인을 총 지휘한다.

손만영은 글안병의 대오를 정비, 만리 장성을 넘어 유주(지금의 북경)로 진격해 갔다. 이에 놀란 즉천무후는 하관상서 (군부대신) 왕효걸(王孝傑) 과 우림대장군 소광휘에게 군사 17만명을 주어 글안의 손만영을 치게 했다. 그러나 왕효걸의 당나라 군사는 동협석의 전투에서 손만영의 글안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대총관 왕효걸과 많은 장병들이 전사 했다.

손만영의 글안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유주를 습격하고 낙양을 목표로 태원으로 향했다. 즉천무후는 상황이 위급하게되자 금오위 대장군 무이종을 신병도 대총관으로 삼고 어사대부 뉴사덕을 청병도 대총관으로 임명 군사 20만으로 글안의 손만영을 치게 했다.

이 때 당나라의 신병도 총관 앙현기(楊玄基)가 특공대를 복병시켰다가 손만영의 글안군이 진격해 올 때 그 선후를 가로 막고 집중공격하자 글안군은 여기서 참패를 당한다. 그리하여 별장 하라소는 포로가 되고 이해고와 노무정은 손을 들고 나와 항복했다.

참패를 당한 글안의 손만영은 부하인 노복 한사람만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노하의 동쪽까지 달려왔다. 큰 나무 아래 안장을 풀고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든 사이에 부하 노복이 손만영의 목을 잘라 청변도 부총관 장구절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리하여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글안의 반란은 3년여만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동북쪽에서 고구려의 걸걸중상과 말갈 추장 걸사비우가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즉천무후는 그 회유책으로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왕으로 책봉하고 큰 죄를 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는 즉천무후의 책봉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항쟁했던 것이다.

즉천무후는 곧 귀순하여 온 글안인의 별장 이해고의 무술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좌옥금 대장군에 임명하고 별장 노무정도 우무위 장군으로 임명하여 고구려의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치게 하였다. 글안군의 별장이었던 이해고는 그 무술이 출중하여 이진충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진충이 전사하고 그 후임인 손만영을 도와 힘껏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다. 영도자 손만영은 도주하였다가 노복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해고는 더 이상 대항할 능력이 없어 당나라에 귀순하였다. 즉천무후는 이해고의 무술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옥검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글안군의 잔당을 토벌케 하고 나아가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치게 했다.

이해고는 글안군과 해군(奚軍;몽고병) 3만명을 이끌고 먼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를 공격하여 그를 참살했다. 아마도 이 때에 대조영도 이해고 에게 크게 당했던 것 같다. 말갈족을 이끌던 걸사비우가 전사했다. 말갈족은 본래 숙신족이라 하여 송화강의 북쪽과 연해주 일대에 군거하던 수렵민족이다.

그들은 수렵과 빈약한 농경으로 그 생활 기초가 아주 열악했다. 그 생산성은 서북의 유목민족들 보다도 오히려 영세하여 국가를 일으켜 발전시킬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하고 서기 1114년 완안부 (지금의 할빈 근처에 살던 여진인)의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기까지 오래인 역사 동안 고구려와 발해에 얹혀 살던 민족이다. 그런데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도 전사했다. 이제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들은 대조영에게 의지하여 그 지시에 따라 행동 할수 밖에 없게 됐다.

<다음호에 계속>

백린(한미 역사 문제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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