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한 컬럼 [5] 일본 다시보기-후쿠오카 III
보스톤코리아  2009-02-06, 18:03:07 
다자이후 정청은 백제의 일본 진출, 멸망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 백제가 망한 7세기부터 12세기의 가마쿠라 막부때까지 500여년동안 규슈를 다스리고 방어한 행정 기관이었다.
또 일본의 국방외교와 무역을 담당했던 기관이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주장하는 정청의 역사와 역활이고 실제는 사뭇 다른 얘기가 된다.

정청은 백제가 한창 국세를 떨치던 4세기 경에 나카스강 상류의 미다쿠(三宅 = 지금 니시데쓰 전철 오바시역 부근)에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에 백제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에게 핍박을 받을 때라 수많은 백제사람들이 규슈로 몰려 들어 오고 있었다. 이들이 기존의 백제 도래인들과 함께 주위의 부족국가들을 통합하여 제법 큰 백제 식민국가를 규슈에 세우게 된것이다.

그때 세워진 다자이후 정청은 백제의 총독부로 규슈를 다스리고 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 관리하던 곳이 었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다자이후 정청의 역사에서 전반부는 빼 버리고 후반부만 주장하고 있다. 정청이 백제의 총독부였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후쿠오카에서 정청을 가려면 시내 중심가에 있는 텐진에서 후츠가이치 시행 전철을 타고, 후츠가이치에서 다자이후행 전철로 바꿔타면 된다. 정청은 역에서 도보로 5-10분 거리에 있다. 종합 운동장 만큼 넓은 유적지에 남아있는 것은 수많은 주춧돌과 에도막부와 명치 유신때 세웠다는 도독부 고지라는 화강암 비석만이 서있을 뿐이다.

서기 660년7월18일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당하자 왜국의 여왕 제명천황(의자왕의 누이)은 태자 중대형(후에 천지천황으로 일본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한 천황)을 데리고 수도를 하카다로 옮기면서 다자이후 정청에 조창궁(朝倉宮)이란 별궁을 지었다.
백제 광복군을 조직하던 중 661년7월에 제명천황이 사망하자, 천황의 유언에 따라 태자 중대형을 제쳐놓고 백제의 부여용 왕자가 실권을 위임받게 된다.

663년6월에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 2만7천명이 400척의 군선을 타고 나노스항을 출항하여 백강(금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대망의 전투를 벌이지만 참패를 당하고 마지막 거점인 주유성 마져 빼앗기게 된다. 이것으로 백제 부흥운동은 끝을 보게 된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일본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로써 백제의 이름은 마지막이다. 이제는 두번 다시 선조의 무덤에 갈수 없게 되었다"로 기록하고 있다.
백제는 일본에게는 선조의 나라가 되고 일본은 백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실토하고 있다. 일본서기 기록자에게 백제는 3인칭의 국가가 아닌 1인칭의 국가였던 것이다.

일본은 백제 사람들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여담이지만 당시에 일본 상류층의 시를 수집해서 만든 "만엽집"이란 시집이 있는데 작가의 절반 이상이 백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필자도 틀림없이 백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쨋던 일본은 종주국 백제가 망한 것을 한탄만하고 있을 처지가 못되었다.

나당 연합군이 언제 쳐들어 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다가 내린 결론이 백제식 산성을 공격로로 예상되는 곳에 축성하기로 했다. 백제 장수들의 도움을 받아 시모노 세키, 쓰시마, 나라현에, 규슈에는 지금의 사가현과 구마모토 현에 모두 11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하였다.

다자이후 정청 주위에는 백제의 억례복류(憶禮福留) 장군이 오노산성을 쌓고, 산성 주위에는 해자 역할을 하는 미즈키수성(水城)을 쌓았다. 백제의 부여성과 마찬가지로 산성과 수성을 겹으로 쌓아 방어를 특히 철저히 한것은 다자이후 정청이 그만큼 중요한 기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계기로 하여 한반도의 신라는 일본에게는 선조의 국가, 백제를 망하게 한 원수의 국가, 쳐부셔야할 국가가 되었다. 어쩌면 신라가 사라진 지금에도 한반도에 대한 혐오감이 그들의 가슴속에 잠겨있는지도 모른다. 제명천황 이후로 일본의 천황들은 대를 이어가며 신라에 대한 중오를 나타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다자이후 정청터에 있는 주춧돌을 면밀히 관찰해보면 모든 주춧돌에 바람개비 형상을 한 파형동기(巴形銅器)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소설가 최인호씨가 "제4제국"이란 가야제국에 대한 다큐멘터리 역사물을 제작할때 직접 확인한 것이다.

파형동기란 바람개비 형상을 한 동(銅)으로 만든 장식품으로 방패에 부착하는 악세사리이다. 일본의 왕릉에서만 발굴되는 일본왕가의 독보적인 표상물로 알려져 왔으며 일본왕의 공식 문양이었다.

태양을 강조한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은 물론이고, 붉은 태양이 중간에 그려진 일장기와 붉은 태양을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빗살이 뻗쳐 나가는 일본군의 군기가 모두 이 파형동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자이후 정청의 주춧돌에 일본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하등 문제될것이 없었다.

그런데 1967년 대전의 괴정동에서 검파형 동기가 출토된것을 필두로 1976년에는 아산군 남성리에서, 1978년에는 예산군 동서리에서 파형동기가 출토되었다. 더구나 1990년에는 옛 가야의 터전인 김해시 대성동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무려 9개의 파형동기가 발굴되었다. 그것도 일본것보다 150년이나 앞선것이었다.

파형동기는 가야의 왕릉에서 출토되었는데 일본의 왕릉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1989년에는 한반도에서 일본에 심어준 야요이 고대문화 유적지가 규슈의 사가현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되었는데 다량의 한반도 유적과 함께 방패에 부착된 파형동기가 출토되었다. 파형동기가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만 출토되는 줄 알았던 파형동기가 한국에서 150년 전에 벌써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한반도의 파형동기가 가야와 백제의 고토(古土)에서 출토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가야와 백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규슈와 긴키 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 파형동기를 사용했던 한반도의 왕족이 일본에서도 왕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하고 싶은 것은 내가 한국 사람으로 가질 수 있는 편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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