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의 세상 스케치 |
보스톤코리아 2009-01-30, 16:29:32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그렇다. 나는 지금 멀리 이국 땅 보스턴 광야에 누워 이육사의 또 다른 '광야'를 노래한다. 차마 누구도 결코 범할 수 없는 그곳 우리(배달)만의 영원한 자유대한, 꿈에도 그리운 내 영원한 모국어를 그리고 그리며 또 기리면서! 아아, 어느새 20여 년이 넘어 흐른 타국에서의 그리움에 때로 문득문득 그립고 보고플 때면 사뭇 달려가고픈 영원한 내 사랑 내 조국! 어릴 적 그 동네 그 동무들 그립고 또 그리운, 내 고향 38선 이북 땅 경기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날마다 음악처럼 한미합동 CPX 훈련에 포성 소리 멎을 날 없던 거기! 6,25 전에는 물론, 휴전 후에도 북한 땅이다가, 다시 민통선 내(內) 마을이더니, 이내 좀더 풀려 40여 년 전부터는 완전히 수복돼 이제는 엄연한 대한민국이 된 파란만장한 질곡과 수모의 땅 나의 고향이다. 한탄강과 임진강이 종횡으로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아직도 다 못 씻고 서럽고도 슬픈 나날을 묵묵히 유유히 내뱉으며 흐르는 한 많은 강하(江河), 합수(合水)머리 부근의 그 광활한 광야가 내 소녀적 꿈의 동산이었다.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나는 지금 이육사의 시 '광야'를 만날 때면 그 광야를 빼어나게 닮은꼴의 이미지 같은 그 고향풍경 품안으로 날아가 본다. 그러니까 열서너 살 중학교 시절 시가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왠지 모르게 시를 좋아하며 지냈다. 문예반 특별활동 시간에는 문예반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에 나가 자연과 함께 수업을 하시곤 하였다. 그 선생님에게 재미있게 배우며 익혔던 소월(김정식)의 '진달래꽃', '못 잊어', '먼 후일' 등을 비롯한, 청마(유치환)의 '행복', '깃발', 그리고 목월(박영종)의 '나그네', '윤사월', '청노루', 그 외로도 파인 김동환의 '산 너머 남촌에는', '웃은 죄', '귀도 없나 입도 없나', 지용(池龍) 정지용(鄭芝溶)의 '향수' 같은 대표시 들은 지금도 가슴에 훈훈히 남아 흐른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나 윤동주의 '서시'와 '자화상', 이육사의 '광야(曠野)', '청포도', 그리고 김춘수의 '꽃'이나 노천명의 '사슴’'등은 특히 인상 깊게 어린 가슴에 작으나마 사랑과 고독에 행복을 일깨워 주었고, 소녀 잔다르크 같은 애국심도 남모르게 싹트게 하였다. 타국에서의 삶이 길어지는 만큼 조국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진다. 그리움이 깊어질 때면 어릴 적 만났던 이육사의 '광야(曠野)'를 자주 떠올리곤 한다. 먼저 '광야'는 한자로 넓을 '廣'자가 아닌, 밝을 '曠'에 들 '野'를 쓴다. 따라서 '광야(曠野)'의 사전적 의미는 "텅 비고 아득히 넓은, 그러나 밝은(所望이 있는) 들"이라는 뜻의 명사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조금 달리 광야를 넓을 '廣'자에 들 '野'를 써 "사막(沙漠)이나 구덩이 땅"으로, 또는 "건조하고 사망의 음침한 땅, 사람이 다니지 아니하고 거주하지 아니하는 땅.(렘2:6)"이라 하여 죽음의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구덩이 땅이라 함은 히브리어로 '슈하'인데 깊은 구덩이에 한번 빠지면 나올 수 없는 '모래 늪'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서적 '광야'는 곧 사막을 의미한다. '미디안 광야'나 '브엘세바 들', 그리고 남방의 '네게브 사막' 등이 바로 그런 류(類)이다. 그러므로 이육사의 '광야'는 '사하라'나 '타클라마칸'과 같은 모래사막의 의미보다는 "붉은 바위와 자갈, 굵은 모래로 된 불모의 땅"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40년은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홍해를 건넌 후 광야 40년은 매일의 일상사가 기적 그 자체였었다. 이를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앞에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어 길을 인도하셨다(출13:21-22)"고 밝히고 있다. 또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광야에서는 시험에 들기도 쉽다. 예수님도 사탄의 보이는 것(떡 )으로의 유혹(質問)에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답(勝利)하셨으니, 이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는 영원 그 자체로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만 살라는 일종의 암시 같다. 그래서 일까. 성경은 우리네 인생을 '광야를 걷는 길'에 곧잘 비유한다. 아무튼 이육사의 "첫닭이 울고 바다로 휘달린 이래"로 우리가 걷는 이 광야(조선을 비롯한 온 지구촌)에는 '편안(easiness)'함이 없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죽어라 '편안'함만을 찾느라 혈안들이다. 사실 저들이 정작 구해야 할 것은 '참 평안(peace), 즉 "샬롬(히브리어로 평화)'이어야 한다. 그것은 광야에 살든 광야가 아닌 곳에 살든, '출(出)애굽'을 하든 '입(入) 애굽'을 하든 마찬가지리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의 이 끝 연은 특히 더 의미가 깊고 매우 인상적이다. 전 세계에 '참 평화'를 그리워하는 우리의 아픔이고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의 슬픔이고 고통이다. 서로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한 핏줄인 탓에 마음은 더욱 아프다. 그 옛날 '광야'에 혼을 놓았던 이육사의 그 마음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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