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14.
보스톤코리아  2009-01-09, 02:48:28 
제목의 글에 앞서 「난공불락의 안시성」에 대한 맺는 말을 먼저 해야 하겠다. 당태종 이세민이 안시성의 싸움에서 양만춘장군에게 패배하고 후퇴하는 과정은 실전을 방불하는 고난이었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신당서」의 기록을 인용하면서도 당태종의 회근 사실을 상세히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원사료인「신당서」의 기록에 따라 당태종이 회군에서 겪은 고초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신당서」는 회군의 실정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날씨는 춥고 눈비마저 내리는데 식량이 다 떨어져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쓰러져 갔다. 요동성에는 양곡이 아직 10만섬이나 남아 있는데도 가져올수가 없었다. 황제의 군사가 요하의 강변인 발착수에 다달으니 갯벌이 80리에 진창길이라 인파가 통행이 어렵고 차마를 운반할수가 없었다. 태종은 장군 양사도에게 명하여 군사 1만명을 동원, 나무와 풀을 베어다가 길에 깔고 차마를 연결하여 다리를 놓고 길을 열어 11월에야 근근히 요하를 건넜다. 태종이 처음 군사를 이끌로 고구려 정벌에 나섰을때는 군사가 10만명이었고, 마필이 1만이었는데 회군하는 도중에 수천명의 병사가 죽어갔고 마필은 거이 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배를 타고 용하게 요하를 건넌 병사는 10만명에 불과했다. 태종은 전사자의 시체를 보아다가 유성 (지금의 조양)에 장사 지내고 소, 돼지, 양을 잡아 크게 제사를 지냈다. 당태종이 제문을 읽으면서 너무나 억울하고 슬퍼서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자, 군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끝이지 않았다."
안시성의 싸움에서 실패하고 돌아가는 패장병의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에게 패배하고 돌아간 당태종 이세민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만일 위징(당태종때의 명재상)이 살아 있었다면 짐으로 하여금 그 같은 어려운 걸음을 결코 하지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세민이 막리지 연개소문에 대한 적개심은 결코 누구러지지 않았다.
이세민은 서기 646년에 제 2차로 우무 위장군 설만철을 보내 고구려정벌을 하게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다음해에 또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강남에서 전선을 만들게하고 협주자사 손복가(孫伏伽)에게 날랜 군사를 모집케하고 동래차사 이도유에게 명하여 군기와 군량미를 발해의 앞바다 오호도(烏湖島)에 저장케하고 제3차 고구려 정벌을 계획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당태종 이세민은 649년 5월에 사망했다. 그래서 이세민과 고구려의 연개소문과의 대결은 연개소문의 승리로 일단 막이 내려졌다.
당태종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가 되었다. 고종황제는 아버지 태종과 달리 지혜도 부족했고 총명하지 못 하였을 뿐아니라 황제로서의 권위도 제대로 수행치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제상 저수량(楮遂良)의 극진한 보좌로 큰 과오없이 국정을 이끌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서기 658년 저수랴이 사망하고 또 당태종의 후궁 무씨 (武氏)를 황후로 들이면서 황실내부에 세력다툼이 치열하고 피를 뿌리는 살상이 번번히 일어났다. 더욱이 고종이 풍현(風眩: 어지러운 병)으로 정사를 제대로 보기 어렵게 되면서 무후가 정치를 독재한다. 사실 서기 660년 백제의 패망과 서기 668년의 평양성의 함락은 이 무후가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었다. 그러므로 무황후의 내력과 정권수행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측천무후는 산서성의 형주도독으로 재목상을 하여 큰 돈을 번 무사의 딸이다. 미모와 재지가 뛰어나 14때에 당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당태종이 황후를 잃은 다음 태종의 무씨는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25년이나 연상인 당태종보다 태자인「이치」에 연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649년에 태종이 서거하자 무씨는 혼자가 되었다. 태자때부터 무씨의 미모에 반하여 연정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아버지 태종황제가 죽자 무씨를 도관(道觀)에 맞겼다가 2년후에 데려다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데리고 살던 여자를 자기가 취하여 후궁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고종은 654년에 무후를 소의(昭儀)로 높이고, 다음해 655년에 왕씨를 폐위하고 무씨를 황후로 만들었다. 때에 고종은 28세였고 무씨는 33세로 5년의 연상이었다.
무씨의 권력에 대한 야망은 도가 넘쳤다. 고종이 전 황후 왕씨와 후궁 애비(愛妃) 그리고 숙비를 자주 찾는 것을 시기하여 그들을 붇들어다가 손 발을 자르고 술통에 빠뜨려 죽였다. 숙비가 죽어가면서 말하기를 "무씨, 네년은 죽어서 쥐가 되고 나는 죽어서 괭이가 되어 너를 물어죽일 것"이라고 악담을 남기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 당나라 황실에는 절대로 괭이를 가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측천무후는 656년 전 황후 왕씨의 소생인 태자 충(忠)을 반역했다고 무고하여 죽이고 자기 소생인 홍(弘)을 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그 아들이 탐탁치 않자 아들마져 죽이고 둘째아들 현(賢)을 태자로 책봉했다. 서기 674년 고종이 풍현(風眩)으로 정사를 보기가 어렵게 되자 무후는 고종은 천황이라 존칭하고 자기를 천후(天后)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측천무후라고하여 매우 조소적인 호칭이되고 말았다.
서기 683년 고종이 55세 나이로 사망한다. 그리고 태자 현(賢)이 황제위에 오르니 그가 중종(中宗)이다. 그런데 측천무후는 이 중종이 자기말을 듣지 않자 서기 685년에 중중을 폐위시켜 방주(房州)로 내쫓고 수공격(垂拱格: 아무일도 하지않고 사람들이 하는데로 내버려둔다)을 발표한다.
이후 서기 690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주(周)라 하고 자기를 신성황제(神聖皇帝)라고 칭하였다. 이것이 측천무후의 후주(後周)이다. 이 후주는 서기 705년까지 15년간 계속된다.
그녀는 황제로서 15년간 중국을 통치한다. 그녀는 당 황실의 이씨 전통이 아니라 후궁으로 들어와 자기의 재능과 술책(術策), 그리고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권력의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 여왕의 제도를 인정치 않는 중국에 있어 전무 후무하게 여 황제가 된것이다.
권력의 자리는 아무나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고 술수, 지혜 그리고 덕망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가무에 능하였고 시문에 통하였으며 또한 명필이었다고 한다.
고서에 이르기를 '빈계사신 유가지삭(牝鷄司晨惟家之索)'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격언은 사실 이 측천무후를 보고 말한것이다.
그녀의 독재는 무서웠다. 반대자는 가차없이 처단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것은 측천무후는 남편이 고종과 함께 신라 뭄무왕의 동생인 김인문 (金仁問)을 아들처엄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다음편에 언급할 평양성의 함락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의 건국과정에서 측천무후와 고구려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백 린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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