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KAL 폭파사건 이후 20년 만에


북한이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20년 만에 삭제됐다. 이에 따라 북한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불능화 조치에 다시 착수했으며, 6자 회담 관련국가들은 미북 간 합의에 기초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검증 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지난 7월 이후 중단됐던 6자 회담도 이달 중 재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 국무부의 션 맥코맥 대변인은 11일, 성 김 북핵 특사, 폴라 드서터 차관보 등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이 추구했던 모든 요소가 핵 검증 패키지에 포함됐다"며 "북한을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한다"고 밝혔다. 맥코맥 대변인은 그간 미국의 계획에 반대 입장을 보여왔던 일본 측과도 밀도 있는 협의를 가졌고 일본 정부도 북한의 테러 지원국 해제에 동의했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로 북한은 대한항공 폭파 사건으로 1988년 1월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된 후, 20년 만에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됐다. 또한 앞으로 북한은 비핵화 진전 여부에 따라 6.25전쟁 이후 지속돼 온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정상화를 추구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국제금융기구가 북한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하는 길도 열리게 될 전망이다.

하지만 테러지원국 해제에 대한 대가로 북한이 약속한 핵 프로그램 검증 의정서에는 사실상 북한이 신고한 영변 핵 시설만 포함돼 있어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북한이 신고하지 않은 미신고시설 사찰 등 핵심사안은 '상호 동의'하에서만 검증이 실시되도록 돼 있어 미국이 대폭 양보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보수파를 대표하는 존 볼턴 전 유엔 대사는 부시 행정부의 이번 조치에 대해 "미국의 치욕이자 95% 북한의 승리"라고 비판했다.

북한 외무성은 "미국의 조치를 환영하며 우리도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를 재개하고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 감시 성원들의 임무 수행을 다시 허용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테러 지원국 명단에 제외되면서, 미 국무부의 테러 지원국 목록에는 쿠바와 이란, 수단, 시리아만 남게 됐다.

미 국무부의 테러지원국 명단은 1979년 12월29일 처음 발표됐다. 당시 명단에 올라 있던 나라는 리비아, 이라크, 남예멘, 시리아 4개국이었다. 이들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나라는 시리아 하나뿐이다. 시리아는 레바논 이슬람 무장정치조직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람지하드, 팔레스타인 정치조직 하마스와 인민해방전선 등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끼었다.

82년에는 쿠바도 리스트에 올랐다. 지난 4월 국무부가 발표한 '국가별 테러현황보고서'에서 쿠바는 "테러와의 전쟁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테러범 추적이나 자산동결 등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나라로 지목됐다.

이란은 이슬람 테러조직들을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84년 등재됐다. 수단은 알카에다 보호 혐의로 93년 명단에 끼었다. 수단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슬람 무장조직 조직원들의 입국 및 자국 내 활동을 불허하고 있으나, 하마스를 용인한다는 이유로 계속 명단에 남아 있다.

명단에서 제외된 나라들은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나라들이다. 이라크는 이란계 인민전사, 쿠르드노동자당 등 테러조직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명단에 들었다가 82년 사담 후세인이 미국과 협력하면서 제외됐다. 이라크는 90년 쿠웨이트 침공으로 다시 올라갔다가 2003년 미군에 점령된 뒤 재차 삭제됐다. 리비아는 핵 포기 선언을 한 뒤 2006년 5월 공식 제외됐다.

정성일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