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8
보스톤코리아  2008-08-11, 23:42:04 
백린(역사학자)


고수(高隋) 5년 전-
수양제는 서기 612년 정월에 24군 113만 3천 8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그 출발에 40여 일이나 걸렸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출정이었던 것 같다.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요위 대장군 형원한은 요동도로 나와서, 9군 35만 명의 대군이 압록강 서편에 진을 치고 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직접 수나라의 군영을 찾아가 먼 행군의 노고를 위로하면서 거짓 항복하는 척 하고 수나라 군대의 동정을 잘 살피고 돌아섰다. 그런데 앞서 수양제가 제 장군에게 지시하기를 고구려의 영양왕이나 을지문덕 장군이 나타나면 즉시 체포하여 호송하라고 일렀던 것이다. 그러나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과 상서우승 유사용의 반대로 을지문덕 장군을 체포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그에 대하여 우익위 대장군 우중문이 항의하기를 을지문덕 장군을 체포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 보낸 것은 황제의 명을 어긴 것이라고 항의하자 사람을 곧 을지문덕 장군에게로 보내서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좀 와달라고 전했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이 그들의 속셈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돌아오고 말았다.
이제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렵게 되자 우중문과 우문술은 모든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추격해 왔다.

을지문덕 장군은 급히 돌아와 대전할 준비를 갖춘 다음 수나라 군사를 평양성 밖 30리까지 유인하여 복병하고 있던 군사로 일제히 반격에 나서자 수나라 군사는 힘없이 무너져 청청강에 이르러서는 거의 괴멸되다시피 했다. 수나라 군사 9군이 요동을 출발할 때 30만 5천 명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한 자는 겨우 2천 7백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엄청난 전과이었던가. 한국의 역사는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고 한다.

이 살수대첩을 중국 역사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隋書)는 당시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다. "고구려군은 싸움에서 불리하면 성 안으로 달아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다가 수나라의 군사가 황제의 명을 기다리는 동안에 쫓아 나와서 공격을 벌이기 수삼차, 수양제는 그 같은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식량은 이미 다 떨어지고 병사는 늙었으며 군수 물자의 수송이 계속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군사들은 굶주리게 되고 전군이 모두 패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군사를 돌이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겨우 뚫고 나와 요서에 이르러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고 돌아왔다"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와 북사(北史)에는 수양제의 군사가 청청강에서 을지문덕 장군에게 패배한 소위 살수대전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고, 다만 수나라 군사가 요동성을 공격하다가 도로 참패를 당하고 돌아왔다는 사실만을 말해주고 있다.

어쨌든 수양제는 제 1차의 고구려 정벌에서 참패를 당하자 그 수치를 만회하고자 613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친정에 나선다.

수양제는 출정에 앞서서 제장수들에게 이르기를 편의대로 종사하라고 분부했다. 각 군단은 길을 나누어 진격해 나갔다. 그런데 고구려군이 나날이 강세를 보여 성책의 함락이 쉽지가 않았다. 이때 중원으로부터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제보가 왔다. 수양제는 그 보고를 받고 크게 놀라 즉시 회군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영양왕은 수나라의 병부시랑(군무국장)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에 망명해 왔기에 그로부터 들어 수양제의 긴박한 사정을 잘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이때를 기하여 수나라 군사의 퇴로를 막고 총공격에 나서니 수나라 군사는 여지없이 무너져 패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나라의 역사서 수서에 기록된 제 2차전에 대한 기록이다.

수양제는 그치지 않고 그의 10년(614)에 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 3차로 고구려 정벌에 나선다. 그런데 이때를 당하여 각처에서 도적 때가 일어나고 또 길이 막히고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병사들이 그 사기를 잃었다. 겨우 요수에까지 이르렀으나 두 나라 군사가 모두 피곤하고, 그리고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병부시랑 곡사정을 돌려 보냈음으로 수양제는 군사를 돌렸다는 것이다.

수양제는 서기 611년, 613년, 614년 이렇게 3차에 걸쳐서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켰다가 도리어 참패를 당하고 국력만 탕진했다. 일본 경도대학의 가와가쓰 요시오(川勝義雄) 교수는 그의 저서 『위진남북조』에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남북조를 통일한 강대 수제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싸울 있는 구력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논평했다. 전후 5년에 걸친 수양제와 고구려 영양왕의 대결은 요동을 놓고 패권을 겨루는 일대 혈전이었다. 수양제는 대국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고구려의 영양왕을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강력한 고구려의 반항으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차에 걸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수양제는 많은 군사와 엄청난 물자를 잃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훼어뱅크 교수는 그의 저서 『신중국사』에서 말하기를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 시도는 국가 자원을 고갈시키고 말았다. 그것이 실패한 결과로 큰 반란이 일어났고 수나라는 결국 천명을 상실했다"라 평했다.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의 실패로 수나라는 말기적인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백성들은 수양제의 몰락을 보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물가의 수양버들은 청청한데 왕궁의 실버들은 이미 시들었네. 풍류 천자의 평시행각도 일장춘몽이 아니냐." 수양제의 제유곡(堤柳曲)이라고 한다. (이 노래의 원문은 옥루몽에 실려 있다. 필자의 번역문이다.) 수양제는 민심의 이반은 생각치 못하고 여전히 폭정을 앞세우고 풍류를 즐기다가 서기 618년 3월에 강도에서 피살되었다.

수문제 양견이 서기 581년 북주를 대신하여 수나라를 세운 다음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하며 150년 간의 분열 시대를 청산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폭군 수양제의 수차에 걸친 고구려 정벌의 실패로 통일 중국 30년(618)에 수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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