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흥망과 발해국의 태조 대조영 4 |
보스톤코리아 2008-05-26, 23:28:41 |
백린 역사학자
미천왕 (재위 300-330)은 제 14대 봉상왕의 동생 돌고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다. 삼국사기는 그를 왕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을불이 봉상왕의 다음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고 할아버지 서천왕의 대통을 이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천왕은 18,9세때 역적의 아들로 몰려 오랬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아버지 돌고가 역모의 혐의로 서기 293년 9월에 형 봉상왕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을불은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도망했다. 봉상왕은 을불을 찾아 내어 죽이려고 병사를 동원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을불은 이름을 감추고 거지행세를 하면서 자기를 체포하려는 자의 눈을 피해 도망다녀야 하는 두렵고 고달푼 생활이 계속되었다. 을불은 수실촌의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그런데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와야 하고, 밤이면 주인의 잠을 깨지않게 하기위하여 연못에서 울어대는 청개구리를 _아야했다. 때문에 잠은 잘수가 없고 또한 일리 너무 고되서 그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동천으로 가 재모라는 사람과 함께 소금장수를 시작했다. 을불은 소금장수로 전전하다가 압록강가의 동천마을로 가서 객주집에 소금짐을 맏기고 유숙하였는데 그 집 노파가 자기의 가죽신을 훔쳐갔다고 무고하여 관가로 끌려가 호되게 얻어맞고 난 다음 소금도 다 빼았긴체 풀려 나왔으나 갈곳 없는 그의 신세는 비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렇게 피나는 7년의 도피생활에서 그는 지칠대로 지쳤다. 더 이상 삶의 희망조차 포기해야할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때 국상 (國相) 창조리(倉助利)가 봉상왕의 독단과 폭정에 반대하여 대신들과 더불어 봉상왕을 축출하고 왕손인 을불을 찾게했다. 국상 창조리가 병사들이 압록강가의 소금배위에서 피곤히 잠들어 있는 을불을 찾아냈다. 을불은 두려워하면서 자기는 왕손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가 돌고의 아들 을불인것을 알고 말하기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우리들은 국상 창조리 어른께서 을불 왕손을 모셔 오라고 보낸 사람들 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그간 왕궁에서 일어난 사실을 설명해 주자 그제서야 을불은 병사들을 따라 나섰다. 을불은 서기 300년 9월에 7년의 도피생활을 끝내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국상 창조리의 추대로 대신들과 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제 15대 고구려 왕이 된다. 마치 영국의 스코트작 (아이반호)의 의한 장면을 보는것 같이 황홀하다. 을불 미천왕은 고구려에 중흥을 일으킨 대왕이다. 왕은 젊었을 때의 도피생활을 생각하여 백성을 극진히 사랑했다. 어린 백성들이 굶주리고 고생하는것을 보며는 왕 자기 잘못 때문이라고 했다. 미천왕은 내정을 공고히 하는 한편 한해에 대비하여 양곡을 비축하고 또 북서부로 부터의 이민족의 공격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했다. 이때가 중국은 5호16국 이라는 대 혼란기였다. 미천왕은 이같이 호기를 노칠세라 요동공략에 나섰던 것이다. 중국의 북평지방을 장악한 연나라의 모용씨와 요동군은 고구려의 발전에 있어서 항상 암적인 존재가 되어왔다. 연나라와 중국세력의 요동군을 정벌지 않고는 고구려가 그 안전을 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미천왕은 그 3년(302)에 현도성을 정벌하여 8천명을 사로 잡았다. 그리고 9년후인 서기 311년에는 요동의 서안평을 정복하였고, 313년에는 요서의 낙랑군을 공략하여 3천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이어 315년에는 중국동북의 보루인 현도성을 공략하여 연 나라와 요동군의 세력을 요하의 저편으로 몰아냈다. 당나라의 연수가 지은 북사 (北史)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위궁 현손 을불이 빈구 요동의 불능제 (位宮玄孫 乙弗利瀕寇遙) 위궁 (산상왕의 별명임)의 현손 을불은 번번히 요동을 침략하였으나 연나라의 모용외는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미천왕은 40여년간 통치하면서 고구려를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킨 주흥의 군주이다. 그런데 미천왕의 아들 제 16대 고국원왕은 아버지 미천왕의 큰 업적에 힘입어 그 기세가 매우 등등했다. 고국원왕의 이름은 사류 (斯由) 또는 교이다. 아버지 미천왕이 서기 331년에 돌아가시자 사유가 왕위에 올랐다. 고국원왕은 그 성격이 좀 호탕했던것 같다. 위서(魏書)는 고국원왕을 소현제라고 했다. 즉 위궁 현손지자왈 소열제 (位宮玄孫之子曰 昭烈帝) 위궁의 현손의 아들 소열제라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소열제라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고국원왕 자신이 자기를 옛 촉한 (蜀漢)의 유비와 같은 중흥의 군주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소열제라고 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고국원왕을 가리켜 소열제라고 호칭한 것은 위서 뿐만 아니다. 수서와 북사에서도 고국원왕을 소열제라 호칭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고국원왕은 연나라 모용황의 침략을 받아 도성이 함략되고 아버지 미천왕의 능묘가 약탈되고 태후 주씨와 왕비가 약취되는 등 참패를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위서(魏書)에서는 "을불의자 교열제시 여모용씨 상공격(乙弗利子 昭烈帝時 與慕容氏 相攻擊) 을불의 아들 소열제시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서기 371년 백데의 근초고왕이 3만대군을 이끌고와 평양성을 공격하자 왕은 70 고령인데도 직접 나가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수서는 고국원왕의 서거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위군현손지사 소열제...위백제 소살 (魏軍 玄孫之子 昭烈帝...爲百濟召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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