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46) |
?????? 2024-11-06, 13:25:50 |
미실이 가장 애지중지했던 막내아들 설보종은 ‘원치 않는’ 결혼을 하였다. 신선처럼 살았던 그는 여자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 미실의 마음은 달랐다. 미실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하여 궁중의 결혼 적령기의 여인들을 불러서 많은 재물을 걸고 며느리를 찾았다. 그들 가운데 보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양명공주였다(양명의 부모는 진평왕과 보명궁주이다). 양명은 보종과 함께 두 딸을 낳았다. 그후 보종은 내사內事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부부로 살았지만 남편 보종은 신선처럼 살았고, 양명은 염장과 모종 등을 사신私臣으로 삼아 염장과는 아들 장명을, 모종과는 아들 양도를 낳았다(모종은 미실의 장남 하종의 아들이니 양도는 미실의 증손자이다. 즉 미실에게는 장남의 손자 양도와 막내 아들의 딸인 보량이 부부가 되었다). 설보종과 양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은 보라와 보량이다. 보라는 김춘추의 첫부인으로 고타소493)를 낳은 후 곧 사망하였다. 보종의 둘째딸 보량은 진평왕의 후궁이 되어 보로전군寶路殿君을 낳았다(보량은 진평왕의 외손녀이다. 즉 보량의 어머니 양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다). 그런데 승만왕후가 보량을 심히 질투하였고 결국 그녀를 출궁시켰다. 승만왕후가 보량을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양도를 사랑하기에 다른 남자에게는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들이 이부동복의 남매간이었기에 양도는 상합相合하는 풍습을 싫어하였지만, 보량은 그 때문에 병이 나고 말았다. 이에 양명이 진평왕의 허락을 받아 마침내 양도와 보량은 부부가 되었다. 이부동복의 누나 보량을 부인으로 맞은 양도는 그녀를 처로 대하지 않고 늘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했다. 이에 보량이 화를 내며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는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 3년이며, 이같이 아름다운 아들(양효)을 낳아 부모가 모두 기뻐하고 내가 너를 잠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느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쇠로 만든 사람도 신상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 백말百斗의 공경은 한 되升의 사랑만 못하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했느냐?” 라고 말하였다. 이에 양도는 보량을 감싸 안아 위로 하면서 “같은 굴穴에서 생사를 같이 하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神과 같이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玉과 같이 한다고 합니다.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하기를 원하지 큰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보량은 양도의 큰 뜻을 알고 남편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였다. 보량은 5살이나 아래인 지아비 양도를 천하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며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다고 늘 말하였다. 아울러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음식을 손수 조리하며 만사에 정성을 쏟았다. 뿐만아니라 항상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남편 양도를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669년 고구려부흥군이 백제땅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공격한 사건으로 당나라가 문제를 제기했을때, 김양도는 김흠순과 함께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 그들은 도착 즉시 당고종에 의해 하옥되었다. 김흠순은 풀여나와 귀국하였고, 김양도는 670년 정월 당나라에서 옥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보량은 지니고 있던 칼로 자결하였다. 이것이 미실이 자녀들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막내 아들 보종의 두 딸인 보라와 보량의 간략한 삶의 궤적이다. 493) 고타소는 김품석의 아내가 되어, 품석이 대야성 성주로 부임했을때 그곳에서 살던 중, 642년 백제의 윤충 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이 침공해 왔다. 한편 품석은 부하 검일의 부인을 탐하여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백제가 퍼부었던 맹공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동시에 검일과 모척이 백제군과 내통하면서 군량창고는 불타고 있었다. 성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전세가 불리한 것을 감지한 품석은 측근 서천西川을 윤충에게로 보내 모두 살려 준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윤충은 이를 받아드렸고, 서천은 돌아와 품석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화랑 죽죽은 “백제는 말을 자주 바꾸는데 쥐새끼처럼 삶을 구걸하느니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 며 윤충의 음모를 간파하고 항복을 반대하였다. 어쨌든 품석은 항복을 결정하고 성문을 열었다. 죽죽의 말대로 윤충은 품석의 뒤통수를 쳤다. 그러자 당황한 품석은 아내 고타소와 자식을 죽이고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한편 화랑 죽죽은 화랑 용석과 함께 나머지 군사들을 지휘하며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춘추는 딸 고타소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날 부터 김춘추를 비롯한 신라의 지도자들은 백제를 멸하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으로 당나라와 손잡고 660년 백제를 멸하였다. 그리고 660년8월2일 승전축하잔치에서 검일과 모척을 죽여 고타소의 원혼을 달랬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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