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45)
??????  2024-11-06, 13:14:00 
미실의 며느리가 된 양명공주는 색사에 관심이 별로 없는 남편 보종을 잘 섬겨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그후 보종이 내사에는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자 양명은 김염장과 사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기도 하였다. 그리고 610년 경에 또 아들을 낳았다. 그가 양도인데, 양도는 총명하여 7살이 되자 어머니 양명공주에게 자신의 이름을 양도良圖라고 지은 까닭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양명은 대답하기가 난처해서 그냥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지은 이름이다” 라고 얼버무렸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양명공주는 양도를 남편 보종으로 부터 낳은 아들이 아니라 (남편의) 조카 모종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사실 양도의 이름은 ‘그날의 사랑’을 양보한 양명의 남편 보종이 지어주면서 모종에게 “그림은 조카의 아들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예언을 하였다. 아마도 보종은 자신이 문장과 화법畵法에 능했기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지어준 것이 아닐까? 어쨌든 양도는 어머니의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지은 이름이라는 말에 동기를 받아 그림 그리기에 정성을 쏟았다. 후일 과연 그의 그림을 따를 자가 없었다. 양도는 특히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를 매우 정밀하게 묘사하였다. 
양도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 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 성장하였다. 즉 양명공주가 미실의 막내 아들인 보종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과 미실의 장손인 모종은 사신私臣으로 하였다. 그래서 양도는 자연스럽게 모종을 숙공叔公이라고 부르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장성하여서 모종이 친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했지만 일찍 알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에 친부인 모종은 너는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보종을 말한다) 를 이었으니 효孝와 연緣을 구별하지 말라고 일렀다. 그래서 보종은 양도를 사자嗣子로 삼아 대를 이엇지만 후대로 전해지는 기록에는 보종의 성인 설씨를 따르지 않고 모종의 성인 김씨를 따르고 있다. 양도는 치밀한 성격으로 매사를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화랑도의 수장인 풍월주를 거쳐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김양도는 김유신을 따라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에 참전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660년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정림사의 석탑 표면에 새기게 한 ‘당평제비’ 의 비문에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 라고 쓰여진 양도의 흔적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양도의 전공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 661년(문무왕 원년) 2월에 사비성을 탈환하려는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된 당군을 구하기 위하여 출정한 원정군의 대당장군大幢將軍 김품일(화랑 관창의 아버지) 의 부장으로서 왕자 문왕文王(무열왕 김춘추의 삼남) 과 함께 참전하였다. 그리고 662년 김유신을 따라 평양을 포위한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가져다주기 위하여 김인문(무열왕 김춘추의 차남)과 함께 파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668년 6월에 고구려 공격을 위하여 편성된 신라군의 지휘부 38총관 가운데 대당총관大幢總官으로서 신라군을 거느리고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렇게 삼국의 통일이 눈앞에 있었지만,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옛땅에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면서 직접지배를 시도하였다. 동시에 신라왕에게도 계림주대도독이라는 작위를 주는 등 신라도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여 백제땅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군사를 공격하였다. 즉 나당전쟁(670년 부터 676년까지의 전쟁으로 신라의 승리로 삼국 통일을 이루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의 서막이 올랐다.
당나라는 신라에 대해 고구려 부흥군 지원 공격을 문제 삼았다.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김양도는 669년(문무왕9년) 에 각간(1등급 관위) 김흠순(19세 풍월주를 역임한 김유신의 동생) 과 함께 당나라로 향하였다. 당나라에 도착한 그들은 해명할 기회도 없이 당고종에 의해 하옥되었다. 이듬해 670년, 흠순은 방면되어 귀국하였지만 양도는 계속 억류되었다. 애석하게도 양도는 그곳에서 옥사하였다. 삼국통일을 위하여 수 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는 통일된 신라에서 살지는 못했다. 외교술에 능한 양도는 생애에 6번이나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669년 6번째 간 그 사행길이 그만 양도의 황천길이 되고 말았다.
아울러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양도가 어렸을때 귀신의 장난으로 온몸이 마비되어 말도 못하게 되었다. 다행히 승려 밀본密本의 도움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불교를 깊게 믿었고 후일 흥륜사 금당의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의 진흙상을 빚어 모시고 그 벽에는 금으로 불화를 그렸다. 또한 두 딸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를 불문에 귀의 시키고 흥륜사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양도는 이부동복 누이인 보량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양효를 비롯하여 6명을 더 낳았고 딸 양시를 두었다. 그에게는 첩/정인이 여럿 있었다. 능보能寶, 춘화春華(17세 풍월주 김염장의 딸), 천운(24세 풍월주 김천광의 누이, 천광은 진흥왕의 증손자이다. 진흥왕- 구륜- 수품- 천광), 명란明蘭 등에게서 서자 10명과 서녀 10명을 낳았다. 흥륜사에 바친 두 딸이 어느 정인의 딸인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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