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43) |
?????? 2024-11-06, 12:12:10 |
김예원이 20세 풍월주로 있던 634년 어느날, 전방대화랑 김진주는 화랑을 물러나와 병부兵部에 들어갔다. 김진주는 유능한 화랑으로 좌방대화랑까지 오르며 낭도들을 지휘하였지만 풍월주에 오르지는 못했다. 20세 풍월주 예원이 634년 차기 풍월주를 김선품에게로 주면서, 김진주는 화랑의 꽃이요 수장인 풍월주에 오르지 못할 것을 알고 병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군부의 최고 관직인 병부령을 역임하였다. 그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많이 전하는 삼국사기를 참고하여 그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 본다. 선덕여왕은 639년(재위8년) 2월 하슬라주(현재의 강원도 강릉)를 북소경으로 삼았고, 사찬(8등급)의 김진주는 장관으로 임명되어 그곳을 지켰다.(658년 무열왕 5년에 북소경을 폐지하였다). 약 20년간의 진주의 생애는 기록이 없다가 659년(무열왕6년) 에 아찬(6등급)의 그는 병부령이 되었다. 무열왕이 660년 5월 백제를 친정할때 김진주는 김유신, 김천존과 함께 선두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였다. 661년(문무왕 원년)에는 대장군 김유신에 이어 김인문(문무왕의 동생), 김흠돌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이 되어 고구려 원정에 참전하였다. 662년8월의 기록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 진주와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이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한가롭고 방만하게 지내며 나라 일을 돌보지 않자, 마침내 죽이고 아울러 그 일족을 멸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이 기록을 근거로 김진주가 622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에는 이어서 670년(문무왕10년)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백제의 …… 를 빼앗았다. 마침 그 일이 발각되자 대아찬(5등급) 진주를 보내 그의 목을 베었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진주는 670년 까지 살아 있었다. 탈자가 있어서 수세가 백제의 무엇(어느 성?)을 빼앗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리고 김진주에 관한 기록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해가 675년이다. “가을 9월에 설인귀가 숙위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목 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을 길잡이로 삼아 천성泉城(현 경기도 파주의 오두산성?)을 공격해 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400명을 목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달아나자 전마戰馬 1,000필을 얻었다.” 이 기록으로 보아 김진주가 670년12월 에서 675년 8월 사이에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처형 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분한 설들이 있다. 631년(진평왕53년) 에 일어난 ‘칠숙과 석품의 난’ 일파와 함께 647년 ‘비담과 염종의 난’ 일파 등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논리로 여왕의 즉위와 치세를 반대한 전통적인 진골귀족의 입장을 대변한 세력과 동조하고 있었다는 설이 그 하나이고, 다음으로는 그가 친당파 귀족 세력이었기에 신라와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문무왕이 김진주와 김진흠을 비롯한 그 일파를 제거하였다고 보는 설이다. 결과적으로 김진주의 삶은 ‘처형’ 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그는 유능한 화랑이었고, 병부에 가서는 병부령에 까지 오르며 삼국통일에 지대한 역할을 한 뛰어난 무장이었다. 한편 20세 풍월주 예원을 이어 그 위位에 오른 김선품은 미실의 외손자이다. 선품의 아버지는 구륜인데 구륜의 부모가 진흥왕과 사도왕후이다. 그리고 선품의 어머니는 보화공주로, 보화의 부모는 진평왕과 미실이다. 진평왕의 아버지는 동륜태자이고, 동륜은 진흥왕의 장자이다. 그러니 보화는 종조부와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나이 차이는 그리 많지 않다. 앞에서 고증한 바와 같이 약 15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진흥왕의 아들과 진평왕의 딸의 아들로 태어난 김선품은 어릴때 김예원을 따라 화랑도에 입문하였다. 그는 용모가 아름다웠고 언행에 절도가 있었다. 문장도 좋아하였고, 선불仙佛에도 통달하였다. 그는 진실로 높은 골의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예원의 누이인 보룡을 아내로 맞이하여 3녀1남을 낳았다. 634년에 풍월주에 올랐다가 637년 김양도에게 그 위位를 물려주고 내성內省(신라, 통일신라 시대에 왕실과 궁궐 관련 사무를 총괄하던 관청이다. 622년, 진평왕44년에 설치하였다) 에 들어가서 임직하였다. 그후 예부의 관직을 가졌다. 643년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병을 얻어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선덕여왕은 걸출한 신하를 잃음에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고, 그의 작을 아찬(6등급)으로 올렸다. 그의 장녀 자의慈義는 제30대 문무왕의 왕후가 되었고,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의 아들 오기의 부인이 되어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을 낳았다. 삼녀 야명夜明은 문무왕의 후궁이 되었고, 외아들 順元은 698년 시중에 올랐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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