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8) |
보스톤코리아 2024-05-13, 11:28:39 |
573년 경, 진흥왕은 해궁에 살고 있는 미실을 직접 찾아갔다. 572년 3월, 동륜태자의 ‘개 죽음’ 사건으로 인하여 미실의 추행도 밝혀지자 그녀는 스스로 출궁하여 사가에 머물다가, 남편 세종이 변방으로 부터 돌아오자 아들 하종과 갓 태어난 수종전군(아버지는 진흥왕이다)을 데리고 해궁으로 가서 근신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진흥왕은 여러해 동안 곁에서 문서결재를 보좌하고 색공을 하던 미실이 갑자기 없어졌으니 공허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수종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여러차례 미실에게 입궁하라고 하명하였지만, 미실은 그때마다 자신의 죄가 크다며 (글을 올려)거절하였다. 결국 왕은 아들을 본다는 핑계로 미실을 만나러 해궁으로 거둥하였다. 그들은 눈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고, 왕은 귀환길에 미실가족을 모두 데리고 돌아왔다. 왕은 사도왕후 전각 왼쪽에 미실이 거처할 신궁을 크게 건축하고 입궁하라고 명하였다. 미실은 당시 세종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기에 해산 후 입궁하겠다고 청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실은 입궁하여 진흥왕을 모셨다. 곧 아들을 출산하였으니, 그가 옥종玉宗이다. 왕은 옥종을 자신의 마복자로 삼았다. 왕의 총애를 독차지한 미실은 심복들을 다시 끌어 모아 중요한 직책을 나누어 주었다. 진흥왕은 곧 질병(풍질風疾로 기록되어 있다)으로 인하여 정사를 볼 수가 없었고 다만 사도왕후를 비롯하여 미실, 보명, 옥리玉理, 월화月華 등 다섯 궁주들의 치맛폭에 둘러 쌓여 지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니 조정의 정사는 사도왕후와 미실이 내정을 장악하였고, 외정은 세종, 설화랑, 미생의 일파가 차지하였다. 한편 588년부터 화랑도를 이끌고 있던 풍월주 하종은 어머니가 미실이기에 대원신통이었다. 그래서 문노파가 잘 따르지 않았다. 이에 미실은 낭도들의 화합을 위하여 보리를 부제로 삼게 하였다. 보리의 부모는 이화랑과 숙명공주이기에 진골정통이었다.481) 외형적으로는 인통의 균형을 이루어 화합을 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조직의 수장과 부제의 인통이 서로 다르니 내면적으로는 반목과 붕당이 심해졌다. 결국 낭도들은 부제인 보리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종은 보리를 좋아하였기에 부제를 교체하기 보다는 이화랑(보리의 아버지)을 찾아가 고언을 청했다. 이에 이화랑은 “선도仙道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인 모랑공毛郞公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나는 못나서 그 도道를 다 듣지 못했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위位를 계승했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위位를 버리고 도道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라고 하종에게 말해 주었다. 모랑은 3세 풍월주를 역임하였다. 모랑의 부모는 제23대 법흥왕과 보과공주482) 이다. 또한 원화의 위에 있을 때 또 다른 원화 준정에게 살해당한 남모의 동생이기도 하다. 모랑은 준모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준모의 부모가 1세 풍월주 위화랑과 준실이다. 이화랑은 준화의 동생이니 모랑은 이화랑의 매형이다. 이화랑의 조언을 들은 하종은 풍월주의 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를 따르던 낭도들은 이화랑(4세 풍월주를 역임하였다) 이 스스로 또 다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 그런 말을 했다며 하종의 결심을 만류하였다. 미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히 걱정하였다. 그래서 사도태후를 찾아가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태후가 조칙을 내려 이화랑과 세종에게 낭도대회를 열고, 크게 연회를 베풀어 낭도들을 화합시키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하종을 따르지 않던 많은 낭도들도 등용하여 조직의 동요를 진정시켰다. 이로써 가야파가 많이 등용되어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이때 등용된 대표적인 인물이 전방화랑前方花郞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이다)이다. 결과적으로 화랑도는 미실과 이화랑과 가야 3파가 이끌게 되었다. 이때가 590년 무렵이었다. 481) 인통姻統은 1대에 한해서 모계를 따르기에, 부자간에도 서로 다를 수 있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玉帽로부터 나왔고, 종宗은 지소태후(진흥왕의 모후)였다.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寶美로부터 나왔고, 종宗은 사도왕후(진흥왕의 왕후)였다. 조祖는 인통의 시작이자 근본 기준이 되고, 종宗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준이다. 즉 신라에서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골통骨統만이 왕실에 왕후/또는 후궁을 들이면서 인맥姻脈을 형성하였다. 인통계보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족보(또는 가보家譜, 세보 등)가 부계를 중심으로 이어진 것에 대칭해 모계 중심으로 이어졌다. 482) 보과공주는 백제 동성왕의 딸이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국공國公으로 백제로 갔을때 보과공주와 사통하였다. 원종(법흥왕)을 잊지못한 보과공주는 후일 도망쳐 신라로 와서 법흥왕과 재회하였고, 그들은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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