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6) |
보스톤코리아 2024-04-29, 11:31:04 |
미생은 조부調府(공물貢物과 부역賦役 등 재무를 담당하던 부서)의 업무는 당두唐斗와 만세萬世에게 맡겨놓고 수 많은 자식들과 함께 유희하였다. 심지어 그는 조부의 관청으로 출근할 때도 수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서 놀다가 퇴청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조부령’으로 부르는 대신 ‘호아령護兒令’이라고 불렀다. 그는 수 많은 처첩으로 부터 낳은 아이들 사랑함이 남달라,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또한 미생은 효심도 깊어서 어머니 묘도를 자주 찾았는데 그때마다 백여명의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그러니 노모는 손자들의 어미를 다 구별할 수도 없었을뿐만 아니라, 누가 피를 물려받은 손주인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 미생과 닮지 않은 아이들을 지적하여 “이 아이의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고 묻기가 항다반사였다. 번번히 미생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라도 찾아서 닮은 바를 대답하며 아이들을 감싸주었다. 미생은 관청에서도 아랫사람을 책망하지 않았기에 관리들은 모두 그를 좋은 재상이라며 따랐다(그는 609년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88년, 미생을 이어 미실의 장남 하종夏宗이 11세 풍월주에 올랐다. 하종은 미실이 남편 세종과 낳은 아들인데도, 하종의 외모가 사다함을 닮았다며, 당시 세간에는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러나 미실과 사다함의 관계를 따라가 보면 하종이 사다함의 아들일 개연성은 거의 없다. 애초 미실은 사다함의 연인이었고, 그들의 사랑은 사해를 뒤덮을 만큼 깊고 넓었다. 그러다가 561년 춘하절春夏節에 미실은 지소태후(진흥왕의 모후)의 부름을 받아, 지소의 아들 세종전군(아버지는 태종이다)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지소태후의 계책을 사도왕후에게 ‘고변’하는 사건으로 인하여 출궁을 당했다. 그 사건은 다름아닌 지소태후는 자신의 딸 숙명공주(아버지는 태종이다)를 진흥왕의 왕후로 책봉하여 자신의 인통인 진골정통으로 인맥을 이으려고 한 것이었다. 즉 지소는 자신의 아들 진흥왕과 딸 숙명공주를 부부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들은 이부동복 남매간이다. 게다가 진흥왕에게는 이미 왕후 사도가 있었다. 사도의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으로, 옥진은 미실의 외조모이고, 미실의 어머니 묘도가 옥진의 딸이니, 사도왕후는 미실의 이모이다. 즉 미실은 이모에게 왕후 폐출과 숙명공주의 새 왕후 책봉계획의 비밀을 알려준 댓가로 그만 지소태후의 노여움을 사서 출궁당했다. 그때를 561년 여름으로 추정한다. 출궁을 당한 미실은 옛 연인 사다함에게로 돌아가 서로 못다한 사랑을 나누며 결혼까지 약속하였다. 한편 갑자기 미실을 잃은 세종은 식음을 전폐하며 앓아 누웠고, 그의 눈에는 미실의 환영만이 보일뿐이었다. 이에 지소태후는 미실을 다시 불러 입궁시켰다(당시를 561년 9월 ~ 10월 경으로 추정한다). 561년 9월(삼국사기에는 562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가야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사다함도 출정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당시 미실은 사랑하는 연인 사다함을 전장으로 보내며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로 불러 전송한 것이 ‘풍랑가風浪歌’ 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 로 화랑세기에 전한다. 561년(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562년이다) 에 모든 가야연맹국들이 멸망한 것으로 보아, 사다함은 동년 승전고를 울리며 귀국하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 미실은 지소태후로 부터 다시 입궁하라는 명을 받았고, 이미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불과 수주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사다함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고, 이에 부른 엘레지哀歌가 ‘청조가靑鳥歌’이다. 이 역시 화랑세기에 실려서 전한다. 사다함은 561년 어느날 사우死友 무관랑의 죽음으로 식음을 전폐하며 그를 애도하다가 죽었다. 아마도 동년 10월 ~ 11월로 추정할 수 있다. 미실의 아들 하종은 갑신생으로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564년생이다. 결과적으로 하종은 사다함의 아들이 될 수 없다. 화랑세기(6세 풍월주 세종조)에도 사람들이 하종이 사다함을 닮아서 사다함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미실은 사다함이 죽자)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밤 과연 미실이 꿈을 꾸었는데, 사다함이 품에 들어오며 말하기를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너의 배를 빌어 내어날 것이다” 했다. 이에 (미실이 세종) 공公에게 말했다. (세종)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을 낳았다. 하종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하종이 588년에 풍월주에 올랐으니 그의 나이 24세 였다. 하종의 부모는 세종과 미실이다. 세종의 부모는 태종과 지소태후이다. 태종의 부모는 아진종(지증왕의 동생)과 보옥공주(백제 개로왕의 딸)라고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소지왕과 벽아부인(날이군 파로의 부인이었다가 소지왕이 그들의 딸 벽화와 함께 500년 왕궁으로 데려왔다)이 태종의 부모라는 설도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또한 태종(이사부)은 삼국유사에서는 박이종朴伊宗으로 등장한다. 내물왕의 4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화랑세기에 기록된 아진종의 아들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더 얻는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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