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25) |
보스톤코리아 2024-04-22, 11:34:21 |
하기 서술하는 내용은 10세 풍월주 미생랑美生郞 조의 10편을 인용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미생은 미실의 질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두의 처를 첩으로 들이게 되었고 그들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당두 역시 부인을 바치고 조부에서 높은 관직을 얻어 출세를 하였고, 게다가 재물까지 챙기게 되었으니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미생은 당두의 처와 함께 아들 셋을 낳았다. 그리고 당두에게 모두 아들로 입적하여 거두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두는 자신의 아들로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결국 미생은 당두의 처로 부터 얻은 아들들을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미생은 조부調府의 영令으로 오랫동안 임직하였다. 영리한 당두의 보좌로 누만금의 재물을 모았다. 당두 또한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국가의 조세와 재정을 관리하는 총수(영令) 미생과 부제(경卿) 당두는 진평왕의 마음이 흡족하도록 업무처리를 잘했지만 자신들의 치부도 아주 잘했다. 또한 미생은 당두의 처남인, 즉 자신이 첩으로 삼은 당두 처의 오라비, 만세萬世도 조부로 불러 관직을 주고 당두를 보좌하도록 하였으니, 조부의 업무는 당두와 만세가 전권을 휘두르게 되었다. 그러자 만세는 미생의 배려에 감복하여 나이 어린 처매妻妹(처제)를 그에게 첩으로 바쳤고, 그녀 또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생은 ‘유능한’ 참모들의 업무처리에 흡족해 하면서, 당두는 자방子房이요 만세는 진평陳平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방과 진평 그리고 등통鄧通은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모사謀士들이다. 1세 풍월주 위화랑조에서 본 바와 같이 법흥왕은 자신을 따른 마복칠성 중의 한명인 위화랑을 일러 ‘나의 등통’ 이라고 위화랑의 능력을 신임하며 칭찬했다. 등통은 한나라 문제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다. 자방은 장량張良(? ~ 기원전186)의 자이다.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나라를 건국한 주역들이다. 즉 유방劉邦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유방으로 부터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 라는 극찬을 받은 중국사를 대표하는 대전략가이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모사謀士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다. 장량은 유방, 소하, 한신과 달리 한韓나라의 명문가 출신이다. 조부 장개지는 소후, 선혜왕, 양애왕 때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 장평도 희왕, 도혜왕이 왕좌에 있을 때 재상을 지냈다. 그러나 기원전 230년,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했고, 장량은 조국을 잃었다. 그래서 진나라에 복수하기 위하여 기원전 218년경, 진시황제의 행차가 박랑사(현재의 허난성 양장)를 지나갈때 창해역사를 시켜 시황제를 살해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름을 바꾼 후 하비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황석공으로 부터 태공병법을 배웠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고 어린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자 환관 조고가 전권을 휘두르면서 진나라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이끄는 농민의 난 등 전국 각지에서 진나라 타도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항량은 조카 항우를 데리고 회계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유방 역시 군사를 일으켜 하비의 서쪽에 주둔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량이 유방을 찾아갔다. 유방의 얼굴에서 제왕의 기운을 느끼고 그를 돕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장량은 뛰어난 계책으로 한고조 유방을 완전한 대륙의 패자覇者로 만들었다. 진평(? ~ 기원전178)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릴때부터 지략이 뛰어난 모사였다. 진나라 말기에 ‘진승과 오광’이 봉기하자 그는 위왕 구를 섬겼지만 중용되지 못하였고, 다시 항우를 따라 진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질 못했다. 다시 유방을 섬기자 유방은 그를 매우 신임하여 중책을 맏기고 수하에 데리고 있었다. 특출한 그의 계책으로 유방은 위급한 상황에서 몇번이나 목숨을 구했다. 기원전202년 유방은 숙적 항우를 물리치고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하지만 반역의 조짐은 사방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초왕 한신의 반역 사건이었다. 기원전201년, 한신을 당장 제압하려고도 했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유방은 진평과 함께 계책을 세워 한신을 체포할 수 있었다. 마침내 한신의 입에서는 ‘토사구팽’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한신이 처음한 말은 아니라는 설도 있다). “과연 내려오는 말이 맞도다. 민첩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하던 개는 소용이 없어 삶아 죽이고(狡兎死 走狗烹), 높이 나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진다(高鳥盡 良弓藏). 적국을 치고 나면 모신謀臣은 망하는구나. 천하는 이미 정해졌다. 나는 처음부터 삶겨질 운명이었어!” 하지만 이때까지도 한신은 모반의 용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설… 오광과 함께 난을 일으킨 진승도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진나라의 무능한 2세 황제 호해와 환관 조고가 혼란스럽게 정치를 할때 농민봉기를 주도하였다. 그는 소작농으로 전전하던 어린 시절부터 허풍을 잘 떨어 그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연작燕雀(제비와 참새)이 어찌 홍곡鴻鵠(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燕雀安知鴻鵠之志哉)”며 지금까지도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 로 변형되어 사용되는 명언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오광과 함께 봉기를 일으킬 때는 “세상에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王侯將相 寧有種乎)” 라며 스스로 장초長楚 라는 나라를 세워 왕위에 오르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사기(사마천),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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