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10) |
보스톤코리아 2024-01-08, 11:40:10 |
때는 572년3월, 신라 왕경 월성에서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장자 동륜태자가 개에게 물려서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태자가 죽은 장소가 다름아닌 왕의 후궁 보명궁주의 내실이었고, 시각은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는 여명이었다. 당시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으로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는데, 입궁하기 전에 상통한 동륜태자가 계속 요구하였기에 (차기 왕이 될 태자를 거역할 수가 없어서) 상응하였다. 하지만 미실은 그 일이 탄로가 날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동생 미생을 불러 의논하였다. 미생에게 태자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함께 유화들을 어색하라고 일렀다. 이에 미생은 태자와 금륜(후에 진지왕) 등과 함께 매일 밤 유화들과 황음한 짓을 하였다. 그런데 동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부왕의 또 다른 후궁 보명궁주464) 의 담장을 엿보았다. 보명은 지소태후의 딸이었으니 동륜에게는 고모뻘이 되었다. 입궁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 ‘수작酬酌’을 걸었지만 보명은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은 장사壯士 몇명을 데리고 담장을 넘어서 들어갔다. 보명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고 기롱짓거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동륜태자는 매일 밤마다 보명궁을 찾았다. 7일째 되는 날 밤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서 담장을 넘어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리고 말았다. 내실에 있던 보명궁주는 밖의 소란을 듣게 되었고 급히 뛰어나와 보니 태자가 자신이 기르고 있던 개에게 물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궁주는 태자를 안고 내실로 들어가 응급처치에 만전을 기했지만 동이 틀 무렵 동륜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자의 죽음에 왕궁은 발칵 뒤집어졌고, 진흥왕은 태자가 왜 보명궁에서, 그것도 새벽에 개에게 물려서 죽었는지 자초지종을 밝히라고 엄명을 내렸다. 즉각 조사는 진행되었고, 죽은 동륜태자의 종인들을 문초한 끝에 밝혀진 사실과 연루된 면면들의 정체는 진흥왕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동륜과 보명의 관계는 물론 미실과의 관계마저 알게된 진흥왕은 크게 옥사를 일으키려 했다. 이에 미실은 목 놓아 울면서 궁을 나가려고 하였다. 미실은 남편 세종과 낳은 10세 가량의 하종과 동륜태자와 낳은 딸 애송공주, 진흥왕과 낳은 반야공주, 난야공주, 막내 수종전군 등 아이들 다섯 모두 데리고 출궁하려고 하였다. 한편 사도왕후는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 라면서 옥사를 거두어 드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왕은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고, 미실을 용서하려고 친히 미실궁으로 거둥하였다. 미실은 눈물로 사죄하였고, 왕 또한 받아드렸다. 그 때 미실의 남편 세종이 변방으로 부터 소환되었다. 동륜태자의 ‘개 죽음’ 사건에 원화 미실을 비롯하여 많은 낭도들이 연루되었기에, 원화를 폐지하고 다시 세종을 풍월주로 세워 화랑도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미실을 계속 전주殿主로 삼아 곁에 두고자 했지만, 왕경으로 돌아온 세종의 믿음/충성심을 잃을까 염려하여 망설이고 있었다(세종은 진흥왕의 이부동복 동생이다. 세종의 아버지는 이사부이고, 진흥왕의 아버지는 입종이다). 464) 보명궁주는 지소태후(진흥왕의 어머니)와 침신枕臣 구진仇珍의 딸이다. 보명은 미실과 함께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의 후궁이었다. 보명은 진흥왕의 아이는 낳지 않았지만(기록상), 진지왕과 석명공주을 낳았고, 진평왕과는 양명공주를 낳았다. 양명은 미실의 아들 보종(아버지는 7세 풍월주 설화랑) 과 혼인하여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보라는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첫 번째 부인이다. 그들의 딸 고타소가 김품석의 부인이 되었다. 품석이 대야성 도독으로 임명되자 대야성에서 살다가 642년(선덕여왕11년) 8월 백제의 윤충이 이끄는 1만 군사에 의해 성이 함락되자, 품석의 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품석은 부하 검일의 아내을 탐하였다가 검일의 원망을 샀고, 검일은 백제군이 침공하자 창고에 불을 질렀고 곧 성은 함락되었다. 반면에 화랑 죽죽과 용석은 항복하지 않고 백제군과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김품석은 좌장군 김품일의 동생이고, 660년 백제의 계백장군의 진영에 세 번이나 찾아가 결투를 벌였다가 전사한 화랑 관창이 김품일의 아들이다. 보량은 진평왕의 후비였는데, 승만왕후의 질투로 출궁하여 이부동복의 남매인 김양도(22세 풍월주)에게 시집을 갔다. 670년(제30대 문무왕10년) 김양도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옥사하자 남편을 따라 죽었다. 한편 보명궁주의 아버지 구진은 대각찬(신라17관등 중 제1위인 각간 위에 설정된 비상설 관등이다) 으로 551년(진흥왕12년) 거칠부, 각찬 비태, 잡찬 탐지, 잡찬 비서, 파진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대아찬 비차부, 미실의 아버지이자 2세 풍월주인 아찬 미진부와 함께 백제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유능한 장군이었다(삼국사기, 거칠부전)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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