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室(5) |
보스톤코리아 2023-11-16, 12:22:15 |
미실을 출궁시키고 난 지소태후는 아들 세종에게 융명458)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융명에게는 관심을 두지않았다. 오로지 미실만을 그리워하였다. 진흥왕 역시 갑자기 뒤바뀐 상황의 진위를 모후에게 물어 보았지만 지소는 왕에게도 소상히 말하지 않았다. 반면, 출궁한 미실은 옛 연인 사다함을 찾아가 그간 못다한 사랑을 나누며, 지아비는 마땅히 사다함이 제일이고 부귀는 한때라며 그들은 부부가 되기를 굳게 언약하였다. 562년 9월(화랑세기에는 개국開國11년, 즉 56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은 이사부에게 가야를 정벌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사다함은 선봉이 되길 청하였다. 진흥왕은 사다함이 어리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다함은 ‘왕명을 어기고’ 휘하의 낭도들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은 당시 남편인 설성薛成459) 에게 “그대는 무품無品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 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 라며 출정하여 사다함을 도우라고 강권하였다. 이에 설성은 사다함의 휘하에 들어 갔다. 많은 낭도들을 이끌고 출정한 사다함은 야인을 대파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의 전공은 치하하며 사다함을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사랑하는 연인을 전장으로 보내는 미실은 그녀의 애틋한 마음을 노래로 불러 사다함을 전송하였다. ‘풍랑가風浪歌’ 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 로 이름 붙혀진 미실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미실로 부터 많은 위로를 받으며 전장으로 향했다. 사다함이 그 전투에서 세운 혁혁한 전공은 화랑세기와 삼국사기(권44)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화랑세기(5세 풍월주 사다함조)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사다함은 16세의 나이로 귀당비장에 임명되어 5천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전단문(가야 왕성의 문)으로 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그리고 대가야의 왕 도설지를 포로로 잡았으니 가야군은 모두 진압되었고 대가야는 종말을 고했다.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온 사다함에게 진흥왕은 많은 전답과 포로들을 상으로 내렸다. 사다함은 모든 전답을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포로들도 모두 양인良人으로 풀어 주었다. 왕이 더욱 기뻐하며 알천의 비옥한 땅을 내리자,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불모지의 수백 경頃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 땅은 낭도들이 전장에 출정하지 않을 때 농사를 지으며 그들의 근면성을 기르게 하였다. 당시 4세 풍월주 이화랑은 사다함에게 풍월주의 위를 물려주었고, 사다함은 설성의 아들이자 이부동복 동생인 설원랑을 부제로 삼았다. 당시 설원랑의 나이 13세 였다. 아쉽게도 부인 금진의 강권으로 대가야 정복에 참전했던 설성은 전사하고 말았다. 458) 융명의 부모는 진종과 보옥공주이다. 진종의 부모는 지증왕과 연제부인이니 그는 곧 법흥왕의 아우이다. 보옥공주는 백제의 제21대 개로왕의 딸이다. 융명의 오라버니 김달복은 정희(김유신의 누이)와 혼인하여 27세 풍월주 흠돌을 낳았다. 흠돌은 김유신의 장녀 진광과 결혼하였고, 딸을 낳아 제 31대 신문왕의 왕후가 되었으니 왕의 장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흠돌은 681년 흥원, 진공 등과 모반을 꾀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그 역모가 이른바 ‘흠돌의 난’ 이다. 459) 설성은 설씨녀의 아들로, 7세 풍월주 설원랑의 아버지이다. 설씨녀는 16세에 유화遊花가 되어, 어느날 사랑하는 낭도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그 낭도는 출정하였다. 3년 후면 온다던 낭도는 돌아 오지 않았고, 14년을 기다려도 오질 않았다. 그 때 구리지(사다함의 아버지)가 우연히 어떤 마을을 지나가다가 설성을 보았다. 신분은 천해 보여도 기상만은 늠름하였다. 그 아이의 부모가 누군지 궁금하여 물어보니 미혼모 설씨녀가 그의 어머니인 걸 알게 되었다. 흙속에 묻혔던 진주같은 설씨녀를 발견한 구리지는 후처로 들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정절이 곧은 설씨녀의 마음을 얻었다. 그리고 합가를 한 설성은 구리지의 용양신으로, 구리지가 548년 독산성 전투에서 죽을 때까지 충심으로 그를 섬겼다. 구리지가 전사하자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은 장남 토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성을 남편으로 삼았다. 그들 사이에서 7세 풍월주 설원랑이 태어났다. 화랑세기(7세 풍월주 설원랑조)에 설씨녀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삼국사기(권48 열전 설씨조)에 기록된 가실과 설씨녀의 이야기는 화랑세기의 이 내용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유학자적 사고를 개입시켜서, 그들의 사랑과 신뢰를 교훈적으로 전하고자 한 것 같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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