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원화源花 미실美實(1) |
보스톤코리아 2023-10-16, 11:29:01 |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기존 사서를 비롯하여 유물과 금석문 어디에도 (아직까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박창화의 필사본 화랑세기에만 미실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여느 풍월주보다도 비중이 크고 내용도 자세하고 풍부하다. 화랑세기 전편에 걸쳐(특히 전반부) 등장하는 미실과 연관된 역사적인 인물들의 관계를 볼 때 ‘필사본’ 이 위서/또는 소설이라고 단정하기엔 박창화의 창작력이 너무나도 경이롭다고 볼 수 밖에 없다(창작품이라면 ‘필사본’은 노벨 문학상을 받아도 조금의 손색이 없는 훌륭한 대작이다). 아직도 일본 궁내청 서릉부 왕실도서관 창고에 쌓여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본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기까지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인물이지만, 미실은 분명 필사본 화랑세기의 기록만으로도 흥미로운 여인이며, 제24대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막강한 권세를 누린 인물이다. 미실은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의 한명으로 색도色道를 가장 잘했으며, 남편인 세종世宗(화랑세기에는 노리부와 다른 인물로 등장한다) 외에도 수 많은 정인들에게(과) 색공/색사를 하였다. 또한 그녀는 이모 사도왕후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제25대 진지왕을 퇴위시키고, 죽은 동륜태자의 장남 김백정을 진평왕으로 옹립하기도 하였다. 동륜은 진흥왕의 장남이고, 진지왕 금륜은 차남이다. 먼저 미실의 가계를 보면, 부모는 미진부와 묘도이다. 미진부는 2세 풍월주로 551년 거칠부 등 7명의 장군들과 함께 북방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의 작爵이 각간角干(1등급)에 까지 올랐다. 미진부의 부모는 아시공과 삼엽궁주이다. 아시공의 부모는 선모와 보혜이다. 미실의 조모 삼엽궁주의 부모는 제23대 법흥왕과 후궁 벽화이다.453) 미실의 어머니는 묘도부인인데, 묘도의 부모는 박영실과 옥진이다. 영실의 부모는 수지공과 보현공주이다. 수지의 아버지는 등흔공이고, 보현공주의 부모는 지증왕과 연제왕후이다. 즉 보현공주는 법흥왕의 누이이다. 옥진의 부모는 1세 풍월주 위화랑과 오도부인이다. 위화랑의 부모는 섬신공과 벽아부인이다. 오도는 법흥왕의 왕후 보도와 동복이부 자매지간이며, 부모는 중僧 묘심과 선혜후(비처왕의 왕후)이다. 묘심과 선혜왕후를 삼국유사에 실린 사금갑조(기이 제1)의 주인공으로 보고 있다.454) 453) 벽화는 500년 제21대 비처왕의 후궁으로 궁궐에 와서 아들 산종을 낳았다. 하지만 동년 비처왕이 죽고(죽임을 당하고?) 지증왕이 즉위하자, 태자 원종(법흥왕)이 벽화를 차지하였다. 벽화는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499년 무렵 어느날, 비처왕이 변방 날이군(현 경북 영주)으로 순시를 갔다. 그곳의 파로가 ‘진상품’ 을 올렸는데, 덮힌 보자기를 열어보니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은 파로의 딸 벽화였다. 그 후 비처왕은 그녀를 못잊어 변복을 하고 몇번이나 왕래하다가, 500년 어느날 왕궁으로 데려와서 후궁으로 삼았다. 454) 사금갑射琴匣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488년(소지왕10년) 정월 보름, 왕이 천천정天泉亭으로 행차를 하는데, 쥐가 사람의 말로 까마귀를 따라가라 하여, 왕은 기사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하였다. 기사는 도중에 돼지 싸움 구경을 하다가 까마귀의 행방을 놓치고 말았다. 이 때 못 가운데에서 한 노인이 나와 봉투를 주기에 받아 보니, 겉봉에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안 열어 보면 한 사람이 죽을 것” 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기사가 왕에게 봉투를 바쳤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열어 보지 않으려 했으나, 일관日官이 “두 사람은 보통 사람이고, 한 사람은 임금이니 열어 보셔야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왕이 열어 보니 “거문고갑을 쏘라射琴匣” 고 적혀 있었다. 궁으로 돌아온 왕이 거문고갑을 쏘았더니, 그 안에는 왕비와 정을 통하던 중僧이 있었다. 그 중은 왕을 헤치려고 숨어 있었다. 왕은 중과 왕비를 함께 처형하였다. 이러한 일로 매년 정월 상해일上亥日, 상자일上子日, 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삼가하고, 행동을 조심하며, 정월 보름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으로 까마귀에게 공양하는 풍속이 생겼으며, 그 못을 서출지라 부르게 되었다.> 화랑세기에는 중 묘심이 선혜후와의 사통이 발각되어 주살당했고, 선혜후는 사당의 제주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에도 “소지왕이 두 명을 죽이기까지의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풍속과 지명의 유래를 설명한 뒷 부분은 나중에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인(김대문)이 쓴 ‘신라의 역사’ 와 고려인(일연)이 쓴 ‘신라의 역사’ 중 어느 것이 더 정확할까?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korea.aks.ac.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www.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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