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32) |
보스톤코리아 2023-08-14, 11:29:33 |
경명왕은 왕후 김씨와 함께 왕자 8명을 낳았다. 하지만 그가 사망한 924년에 그 8명의 왕자들이 모두 어렸기에 차기 왕위는 상대등이자 동생인 박위응이 즉위하였다. 그가 제55대 경애왕이다. 한편 당시는 이미 고려가 건국되었다. 877년에 태어난 왕건은 896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태봉의 국토를 확장하여 세력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과 교전하면서 승리를 거듭하였고, 궁예의 총애로 마흔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시중에 올라 태봉의 ‘일인지하만인지상’ 이 되었다. 그러나 궁예의 독단과 전횡은 날로 심해졌고, 이에 많은 불만을 품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의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마침내 918년 거병하여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또한 북쪽에는 발해와 거란이 끊임없이 교전을 하고 있었다(결국 926년 발해는 거란에 의해 멸망되었다). 924년 경애왕이 즉위했을때 이미 신라는 쇄퇴하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몹시 가난했으며 고려와 후백제의 압박으로 영토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고려와 동맹을 맺어 국력회복에 힘을 썼지만 이미 한반도의 대세는 고려와 후백제가 양분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견훤의 공격이 곧 서라벌을 침공하리라는 것을 예견한 경애왕은 고려의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고려군이 미처 오기도 전에 견훤이 먼저 신라를 점령했다. 경애왕의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요약해 보면, <왕건이 장군에게 명命해 굳센 병사 1만 명을 내어 구하게 했으나,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 왔다. 경애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의 군사가 닥치는 줄도 모르다가 허둥지둥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 사녀士女 등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치 못했다. 견훤은 또 군사를 풀어 공사公私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 사람들을 시켜 왕을 찾으라고 했다. 왕은 왕비와 첩 몇 명과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영에 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윽박질러 자살케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겁탈했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그가 경순왕이다.> 경애왕은 과연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서 그것도 엄동설한 일조량도 짧은 날을 잡아 왕비와 궁녀, 왕실의 친척과 경공대부 등 수 많은 시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어 놓고 이른바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향연을 즐길 수 있었을까? 고려는 국난이 있을때 마다 대장경을 판각하였다. 첫번째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이 잦아지자 1011년 부처의 힘으로 호국하고자 10여년간 판각하였다. 후에 몽골군이 침입했을때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고 다시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1236년에 조판하여 16여년에 걸쳐 완성한 대장경이 팔만대장경이다(국보 32호). 우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이렇게 국난 중에 탄생되었고, 200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실적인 면에서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칼이 없으면 막대기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야지 불경을 읽고 목판에 새긴다고 적병이 물러갈 것인가! 그렇지만 군사력이 부족하면 ‘부처의 힘’ 에라도 기대에 백성의 의지를 한곳에 모아 혼란스러운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난을 극복하는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애왕도 비빈들과 모든 대신들을 데리고 신라의 호국 사당인 포석사로 나가서 마지막으로 호국신들에게 나라를 구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음이 분명하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포석정에는 포석사라는 사당이 있었다. 여기에는 8세 풍월주인 문노의 화상이 모셔져 있었다. 문노가 누구인가? 격검술이 신기에 달했고 그가 이끌던 화랑도는 호국선護國仙이었으며, 그는 그들의 수장이었다. 견훤이 쳐들어 왔을때, 경애왕은 주연을 즐긴 것이 아니라 문노 등의 대영걸을 모신 사당인 포석사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왕이 할 수 있었던 의식, 즉 나라의 안위를 기원하며 호국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경애왕의 마지막 ‘공식행사’ 인 이 장면 외에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또 한차례 등장한다. 제49대 왕인 헌강왕(재위 875~885년)대의 기록이다. “왕이 또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神이 임금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헌강왕은 여러차례 포석정으로 행차한 것으로 보여진다). 50여년의 시차를 둔 경애왕의 기록은 향연으로 나오지만 헌강왕의 기록은 신神이 출현한다. 음미해 볼 만한 대목이다. 포석정은 나라가 망해가는 말엽에는 유희장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건립 초기에는 신궁과 함께 한 쌍의 신성한 장소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www.korea.aks.ac.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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