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30) |
보스톤코리아 2023-07-20, 14:37:10 |
제52대 효공왕은 신라 56왕 중 유일하게 진골의 신분도 못되었지만, 정변을 일으키지 않고도 왕위에 올랐다(제37대 선덕왕 김양상의 신분도 논란이 있다. 하지만 그는 가야계 김흠순의 증손자로, 항복해 온 구형왕을 비롯한 왕족을 모두 신라의 진골 신분으로 편입하였기에 김양상 역시 진골이다). 효공왕 김요의 어머니는 평민이었다. 제49대 헌강왕이 884년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백성들 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왕은 그만 그 여인의 미색에 빠져 유궁(이동식 장막)에서 야합하였고, 그 후 태어난 사내아이가 효공왕이 된 김요이다. 효공왕의 출생년도나 헌강왕의 사냥행차 시기의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887년7월, 진성여왕 즉위년)에서 인용한 최치원의 납정절표納旌節表의 기록에서 그의 나이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김요의 아버지 헌강왕은 886년 7월5일(음력)에 사망하였다. 당시 왕의 서자 김요는 돌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김요는 885년 8월에서 886년7월 사이에 태어났다. 아울러 헌강왕의 사냥행차와 야합사건은 884년10월에서 885년9월 사이에 있었다는 계산이 된다. 어쨌든 그의 나이와 (또한 그의 신분 때문에) 차기 왕위는 헌강왕의 동생인 김황金晃에게로 이어졌으니 그가 정강왕이다. 정강왕은 ‘임시’(납정절표의 기록이다)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정확하게 1년 후인 887년7월5일 후사없이 사망하였다. 헌강왕의 서자 김요는 당시 두 돌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차기는 정강왕의 유언으로 여동생 김만에게로 이어졌으니 그가 진성여왕이다. 진성여왕 역시 후사가 없었다. 의붓아들 김양정(양패, 양원)이 있긴하였지만, 진성여왕은 897년6월1일 서조카 김요를 불러 차기 왕위를 물려주고 동년12월4일 사망하였다(김요는 875년 태자로 책봉되었다. 진성여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살아서 왕위를 물려준 몇 안되는 왕이다). 김요는 진골의 신분도 아닌 평민 어머니의 아들로 왕이 된 신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그가 효공왕이다. 겨우 12세 무렵에 즉위한 효공왕은 14세 무렵인 899년 박예겸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효공왕 시대에는 지방 호족들이 군웅할거하였다. 892년에 거병한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901년 궁예447) 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바야흐로 한반도에는 ‘후삼국 시대’ 가 펼쳐졌다. 그리고 견훤과 궁예의 공격으로 수도 금성과 삽량주(현재의 경남 양산시)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효공왕은 처음에는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부백관들의 작위도 올려주면서 선정을 펼쳐보려고 노력을 했지만 계속되는 지방 호족들의 봉기로 국토는 축소되었고 왕권도 실추되었다. 말년에 왕은 (신분이)천한 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에 은영殷影이 간언하였지만 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은영은 왕의 첩을 죽이고 말았다. 효공왕은 912년에 후사 없이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고작 26~7세였다. 효공왕을 마지막으로 785년에 즉위한 제38대 원성왕의 후손들이 계승했던 왕위는 모두 끝났다(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가 원성왕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그는 견훤에 의해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제17대 내물왕(마립간)부터 이어져 온 556년간 김씨에 의한 독점적 왕위세습 또한 종말을 고했다. 차기 왕은 효공왕의 처남이자 박예겸의 아들인 박경휘가 차지하였다. 그가 제53대 신덕왕이다. 447) 궁예는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과의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이다.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 면은, 적자가 없었던 헌안왕은 도성의 모든 진골 젊은이들을 임해전으로 집합시켜서 그 중에서 가장 출중하하다고 생각되는 김응렴을 선택하여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래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궁예는 유모의 도움으로 피신하여 세달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 면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그가 축丑년생인데, 축년은 857년, 869년이다. 그가 891년 절을 떠나 처음으로 봉기/반란에 참여한 것으로 보면 869년생, 즉 경문왕의 서자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궁예의 출생 비화를 간추려 보면, 그는 음력 축丑년 5월5일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무지개 형상을 닮은 흰 빛이 지붕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그는 태어날 때부터 치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단오에 태어난 아이를 불길하게 여기던 세습世習과 궁예의 특이성을 종합하여 일관은 아버지인 왕에게 궁예를 죽일 것을 청했다. 그래서 왕은 중사中使(궁중에서 왕명을 전하는 내시)에게 명하여 그를 죽이라고 하였다. 왕명을 받은 중사는 궁예를 포대기에 싸서 높은 누대 위에서 던졌다.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유모는 누대 아래서 떨어지는 궁예를 받았다. 다행히 아기의 목숨은 구했지만 이때 유모의 손가락이 눈을 찌르는 바람에 궁예는 한 쪽 눈을 실명했다. 유모는 궁예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 그를 길렀다. 10여세가 되어도 말썽만 일으키는 궁예에게 유모는 그의 출생의 비밀을 말해주었고, 이에 깨우친 바 있었던 궁예는 집을 나와 세달사에서 도력을 키웠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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