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25) |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 2023-06-19, 13:42:26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과연 진성여왕眞聖女王은 음란하고 무능하였을까? 후대 학자들은 신라가 망국의 길로 접어든 시기가 진성여왕 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신라는 이미 제36대 혜공왕(765~780년 재위) 시대부터 국력은 약해지고 있었다. 780년 ‘김지정의 난’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었다. 그런데 난을 일으킨 김지정 일파가 시해했는지, 난을 진압한 김양상과 김경신 일파가 시해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어느 세력이 난을 일으켰는지도 의문이 갈 만큼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어쨌든 그 난은 김양상 일파가 제압하였고, 김지정은 처형되었으며, 혜공왕은 후사가 없었다(혜공왕은 동성애자이거나, 성전환 수술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회적 성Gender과 생물학적 성별Sex이 일치하지 않은 ‘트랜스젠다’ 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세한 내용이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그러니 용상은 주인을 잃었고, 그 빈 자리를 김양상이 차지하였다. 그가 선덕왕이다. 그는 신라의 56왕 중 유일하게 족보가 의심되는 왕이다. 상대등까지 올랐지만 그의 정확한 족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화랑세기에서 그의 가계家系를 찾아 볼 수 있다. 김양상의 아버지는 김효방이고, 조부 김원훈金元訓은 화랑의 19세 풍월주 김흠순의 아홉째 아들이다(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김흠순의 아버지는 김서현, 조부는 김무력, 증조부는 가야에서 신라로 항복해 온 구형왕이다. 그러니 김양상이 유일한 가야계 혈통으로 신라의 왕을 지낸 인물이다. 선덕왕 김양상도 후사가 없이 죽자 그의 최측근에서 ‘2인자’ 로 평생을 살아온 당시 상대등 김경신이 왕위를 차지하였다. 국인들은 끊어진 왕통을 잇기 위하여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차남 김인문의 후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옹립했지만, 그가 홍수로 불어난 알천을 건너지 못하고 지체하는 틈을 타서 왕궁에 있던 상대등 김경신이 왕좌를 차지하였다. 그가 제38대 원성왕이다. 그로 부터 제51대 진성여왕까지 원성왕의 후손들이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왕위쟁탈전을 하거나 단명으로 인하여 왕위가 안정된 기간이 결코 길지 않았다. 물론 제52대 효공왕도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 원성왕의 후손이지만 진골의 후손은 진성여왕으로 절손이 되었다. 또한 방계족의 진골은 남아 있었지만, 이미 한반도에는 후삼국이 형성되었고, 겨우 왕도王都만 지키게 되었던 신라는 더 이상 진골이란 신분은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었다. 그러니 신라를 지키지 못하고 후삼국을 형성한 시기의 왕, 즉 진성여왕은 후대 학자들로부터 문란하고 무능한 군주로 평가 받고 있다. 과연 그녀는 문란했을까? 진성여왕이 문란했다는 이유는 숙부인 김위홍과 사통한 후 남편이 되었다는 것과 남편이 죽은 후 젊은 미남자 두어 명을 내실로 들여 사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대 신라인의 눈으로 보면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신라는 골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혼을 하였고 심지어 이부동복/또는 동부이복의 자매들이 혼인하였다. 법흥왕의 딸 지소는 숙부인 입종과 혼인하여 삼맥종을 낳았다. 삼맥종이 진흥왕이다. 입종이 일찍 죽자 지소는 이사부와의 사이에서 세종과 숙명공주를 낳았다. 뿐만아니라 법흥왕은 딸 지소를 박영실(법흥왕의 생질이다)과 혼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지소는 4세 풍월주 이화랑과 사통하여 만호공주를 낳았고, 만호는 진흥왕의 장남 동륜의 부인이 되어 진평왕을 낳았다. 또한 진흥왕 시대에 국토확장에 크게 공헌한 장군 구진仇珍도 지소의 침신이었다. 그에 더해 지소는 아들 진흥왕과 딸 숙명을 혼인시켜 성골의 유지는 물론 모계로 내려오던 ‘진골정통’ 으로 왕후의 자리를 이으려고 하였다. 진흥왕과 숙명공주 사이에서 정숙태자가 출생하였지만, 그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조졸하였다. 그러나 이 그후 어느 역사서나 학자들이 지소태후가 문란한 성생활을 하였다는(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기록은 보지 못했다. 신라의 여왕 세명의 공통점은 모두 불임이었다. 다만 제28대 진덕여왕의 남편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그 유무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당시는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모든 성골 남자의 씨가 말랐다. 그래서 진평왕은 차녀 덕만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녀가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의 남자에 대한 기록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미혼으로 삼국유사에는 음갈문왕이 남편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자세하게 나온다. 제25대 진지왕에게는 용수와 용춘 두 아들이 있었다. 선덕은 용춘을 남편으로 맞았다. 그러나 임신을 하지 못했다. 성골을 얻기에 조급해진 진평왕은 용춘의 형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도록 했지만 역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당시 용수는 선덕의 언니 천명공주의 남편이었다. 세월이 흘러 진평왕과 용수는 죽었고, 용춘이 형의 부인 천명과 아들인 김춘추를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다. 선덕여왕은 또 다시 용춘을 지아비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임신이 되질않았다. 그래서 중신들의 제안으로 흠반과 을제를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선덕여왕은 후사를 낳지 못했고, 647년 선덕여왕이 사망하고 사촌인 승만이 왕위에 오르니 그녀가 진덕여왕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진덕여왕은 후사를 얻기 위하여 선덕여왕과 같은 방법으로 노력했을 것이며 다수의 남편이 있었다고 가정해 본다. 다만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을 뿐이다. 결국 왕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다음 왕위는 진골의 신분인 김춘추에게로 이어졌다. 위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진골마저 씨가 말라가는 왕가의 후계를 위한 진성여왕의 행위는 절대로 문란하다고 볼 수 없다. 53명의 남자 왕들은 거의 모두 수 많은 후궁을 데리고 살았다.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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