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20) |
보스톤코리아 2023-05-15, 11:44:59 |
헌강왕은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아버지 경문왕 대의 사회상과는 상이하게 태평성대를 누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80년 왕이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백성들의 지붕은 볏짚이 아닌 기와로 이어졌고, 밥을 할 때는 장작이 아닌 숯으로 하는 것을 봤다는 풍요로움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부유함은 대다수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았다고 보기에는 다소 미심적다. 아마도 그런 생활상은 일부인 진골귀족들이나 헌강왕 재위시부터 정치적인 성장을 이루어 왕의 지지세력으로 기반을 잡은 6두품의 계층 이상이 아니었겠는가? 어쨌든 헌강왕 재위시에는 대로에 민가들이 즐비하였고 가무가 끊이질 않았다는 기록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는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그리고 금강령金剛嶺에 갔을 때는 북악신北岳神과 지신地神이 나와 춤을 추었다. 즉 왕이 어가를 타고 출타나 순행을 할 때면 백성들이 나와서 춤을 추었다는 것은 나라가 태평성대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북악신과 지신이 춤을 추면서 ‘지리다도파도파地理多都波都波(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해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은 태평성대라기 보다는 무너지는 나라의 앞날을 암시하고 있었음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실제로 당시에는 이미 견훤(867년생) 과 왕건(877년생) 이 태어나 성장하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만들어진 설화이기는 하지만 왕건의 선조들은 몇 대에 걸쳐 왕건의 탄생을 예고하는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헌강왕 대의 대표적인 춤이 처용무이다. 삼국유사(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 에 실린 내용을 요약해 보면, 879년 왕이 학성鶴城(울산) 으로 유람을 갔다가 귀경하던 중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일관에게 물으니,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리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왕은 근처에 절을 짓게 명하였다. 곧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다. 이에 그곳을 개운포開雲浦(외황강 하구 지역) 라고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고 노래를 하였다. 그 중 이상한 생김새와 괴이한 옷을 입은 용의 아들 하나가 왕을 따라 서라벌까지 왔다. 그가 처용處容이고, 왕은 처용에게 급간(9등급, 6두품이나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벼슬이었으니 가히 파격적이 아닐 수 없다) 의 벼슬을 내려 정사를 보좌하게 하였다. 또한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맺어주기도 하였다. 그는 달밤이면 밖에 나가 춤을 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기에 아내를 집에 두고 자주 외출을 하였다. 한편 처용의 미인 아내를 흠모한 역신疫神(질병을 전파하는 신) 이 사람으로 변하여 어느날 밤 그녀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밤늦게 까지 밖에서 놀다가 돌아온 처용은 이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이 향가가 처용가이다). <동경東京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역신은 처용 앞에 꿇어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겨, 맹세코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사악한 것을 피하고 좋은 일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헌강왕은 귀경하여 영축산 동쪽 기슭의 경치가 좋은 곳에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다.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하였다.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망해사는 울주군 영축산에 현존하는 사찰이다. 기와집에 살면서 숯으로 취사를 하고, 백성들이 밤낮으로 춤을 추고 노래하는 풍요한 태평성대를 구가한 헌강왕의 치세도 그리 오래가질 못하였다(말년에는 흉년이 들고 굶는 백성들이 많았다는 기록도 있다). 헌강왕은 886년에 사망하였다. 출생년의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료로 근사치를 구할 수 있다. 헌강왕 김정의 아버지는 제48대 경문왕 김응렴이다. 응렴의 출생연도는 841년 또는 846년의 기록이 있다. 841년일 개연성이 더 크다. 경문왕은 헌안왕의 사위가 되면서 861년에 즉위하였다. 즉위 전에는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으로 수 많은 화랑들을 지휘하였고, 또한 그들을 데리고 국토를 순례하였다. 한편 헌안왕은 아들이 없어서 모든 진골들을 임해전에 모이게 하여 화랑의 국선 김응렴을 ‘특채’ 하여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런 객관적인 그의 삶의 궤적으로 보아, 즉위시 그의 나이가 15세라기 보다는 20세가 설득력을 더 얻는다. 그리고 경문왕은 14년 재위하고 875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남인 헌강왕 김정은 언제 태어났을까? 김응렴이 헌안왕의 장녀 문의공주와 결혼하고 4개월 후에 경문왕으로 즉위하였다(헌안왕은 861년 음력1월29일 사망하였다). 즉 경문왕의 장남인 헌강왕 김정은 861년 또는 862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헌강왕은 875년에 제4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13세 가량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고, 11년 재위하다가 886년 음력 7월5일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태자 김요金嶢가 두살이 채 되지 않았기에 헌강왕의 동생인 김황金晃이 제 50대 정강왕으로 즉위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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