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32세 풍월주風月主 신공信功(18) |
보스톤코리아 2023-05-01, 11:33:42 |
681년 자의태후가 화랑도의 풍월주 제도를 폐지하고 난 이후에는 화랑의 수장이 국선으로 불리우며 935년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국선이 우두머리로 화랑의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의 아버지인 김효종도 화랑의 국선이었다). 다만 화랑세기 같이 ‘국선세기’ 나 국선들의 활약상을 체계적으로 편찬한 사서가 없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다소의 국선들을 만날 수 있다. 화랑의 국선인 김응렴은 그의 어진 마음이 헌안왕을 감동시켜 왕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24세 풍월주 천광공조 참조). 제47대 헌안왕은 아들이 없이 문의공주와 정화공주인 딸만 둘이 있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과 같은 선례가 있기는 하였지만 헌안왕은 공주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보다는 사위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의 아픔을 잘 어루만질 지혜로운 인물을 고르고 싶었다. 860년 어느날, 왕은 모든 진골 귀족들에게 임해전으로 모이라고 명하였다. 그 중에서 국선 김응렴이 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어 그를 불러 그간 낭도들을 이끌고 나라 안을 유람하면서 본 일을 묻자 응렴은 세 사람을 말하였다. “첫째 사람은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하나 겸손해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요, 둘째 사람은 부호이면서 옷을 검소하게 입는 사람이요, 셋째 사람은 고귀한 세력가이면서 그 위엄을 보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라고 대답하니, 헌안왕은 그의 어짐을 알고 응렴을 사윗감으로 낙점하였다. 그리고 나서 헌안왕은 “큰 딸은 20살이고 작은 딸은 19살이다. 그대가 마음에 드는 딸과 결혼하라” 고 하였다. 즉답을 하지 못한 응렴은 집으로 돌아가 부모들에게 말하니, “큰 공주는 못생겼다는 소문이 있는데 작은 공주가 더 낫지 않겠느냐?” 라는 대답을 들게 되었다. 이에 더욱 마음이 혼란스러워 결정을 하지 못하고, 흥륜사의 승려를 찾아가서 그의 고민을 말했다. 그러자 그 승려는 “언니에게 장가를 들면 3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고,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3가지 손해가 있을 것이오” 라고 말해주었다(삼국사기에는 흥륜사의 승려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범교사가 말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응렴은 장녀와 차녀, 미녀와 추녀 사이에서 저울질만 하다가 결정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헌안왕에게 가서 누구든 좋으니 왕명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첫째 딸 문의공주를 김응렴과 혼인시켰다. 그리고 약 4개월 후 861년 1월29일(음력) 사망하였고, 응렴이 왕위를 이으니 그가 제48대 경문왕이다. 결과적으로 김응렴은 흥륜사의 스님/또는 화랑의 수장이 말한 3가지 이익을 모두 다 챙겼다. 그 3가지란 왕과 왕비의 뜻에 따랐기에 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로 인하여 왕이 되었으며, 마침내 처음부터 마음에 두었던 둘째 딸도 후비로 맞을 수 있었다. 경문왕은 불교에 관심이 많아, 국선의 위位에 있을 때 그가 데리고 있었던 화랑도 중에는 승려들도 많이 있었다. 김응렴이 누구를 아내로 맞을지 고심하다가 흥륜사의 승려를 찾아가 조언을 얻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전하고, 화랑의 우두머리 범교사에게 조언을 들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데, 아마도 두 인물이 동일인일 개연성이 크다. 응렴이 얻은 조언의 내용은 두 사서 모두 동일하다. 그리고 경문왕이 된 김응렴의 정치를 보좌한 인물들 중에는 국선과 화랑도 출신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요원랑邀元郞과 예흔랑譽昕郞은 측근에서 도우기도 하였으며, 또한 전국을 유람하면서 왕의 업적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그들이 전국을 유람하면서 불렀다는 노래는 전하지 않지만, 그 향가의 제목은 전하고 있다. 경문왕은 혼신의 힘으로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의 치세 15년간(861 ~ 875년) 여러차례의 호족의 반란과 왜구들의 침입이 있었다. 또한 지진, 홍수, 역병도 연이어 발생하였다. 게다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다수의 역모 사건은 신라 하대를 혼돈의 늪으로 더욱 깊숙히 밀어넣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찬(2등급 관위)윤흥允興과 그의 동생 숙흥叔興과 계흥季興의 반역(866년), 이찬 김예金銳와 김현金鉉의 모반(868년), 특히 874년 근종近宗은 궁궐까지 쳐들어왔다. 자칫 또 한번의 국왕 시해 사건이 있을 뻔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경문왕에 관한 재미있는(기이한) 이야기 두가지, ‘뱀과 당나귀 귀’, 먼저 뱀 이야기를 보면, <왕의 침전에는 날마다 저녁이면 뱀들이 수없이 모여 들었다. 궁인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쫓으려 하니 왕은 말하기를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으니 쫓지 말라” 했다. 왕이 잘 때는 늘 뱀들이 혀를 내밀어 온 가슴을 덮어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저 해괴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임금의 고뇌를 상징하는 것일까? 즉 잘못 물리면 죽을 수도 있는 권력을 품에 안고 자는(또는 밤을 지새우는) 최고 통치자의 고뇌를 뱀에 비유한 것인가? 다음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 편이다. <경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그러나 오직 복두장(임금의 왕관과 머리를 챙기는 사람) 만이 알고 있었다. 복두장은 평생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가/않았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속에 들어가서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생겼다!” 그 후로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같은 메아리가 들렸다. 왕이 곧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자 그 소리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로 바뀌었다.> 이 기록 역시 많은 것을 시사한다. 큰 귀는 백성들의 고충을 잘 듣는다는 것이고,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는 대나무 숲은 백성들의 여론이 아니었을까?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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