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세상 - 종이의 집 |
보스톤코리아 2007-08-20, 06:58:00 |
종이의 집 (박제천 (1945~))
사람들은 나무와 돌로 만들어내는 종이에 글씨를 쓰지요 나 역시 40년이나 종이와 함께 살았어요 종이 한 장 펴놓으면, 세상이 다 내세상 같아 뿌듯했지요 이세상의 기쁨은 물론 저세상의 죽음이며 고통도 만났지요 내게 있어, 종이는 내 살이었어요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나는 그 종이의 집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종이마다 내 삶을 써놓았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못이 되어 내 삶을 벽에 박아버렸답니다 그래서 나는 하늘이며 바다를 종이 삼아 새와 물고기, 파도와 비바람으로 글씨를 써보았지만 그것들 역시 덫이 되고 닻이 되었지요 이제 나는 눈으로 종이의 집을 만듭니다 내리는 눈송이, 눈송이마다 눈이 있고, 가슴이 있고, 물과 불로 반짝이는 눈송이 종이를 만들지요 눈송이 종이에 하염없이 써나가는 글씨들은 내가 미처 보기도 전에 물로 사라진답니다 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그 반짝임, 그 반짝임에다 나는 오늘도 글씨를 쓰고 있어요. 옛사람들도 처음에는 풀잎이나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지요. 아니지요, 그 처음엔 나처럼 마음에다 글씨를 썼겠지요. 해설) 이렇게 큰 종이를 보셨는가.“물이 되고, 공기가 되는 그 반짝임,/그 반짝임에다 나는 오늘도 글씨를 쓰고 있어요”.우리가 사람을 논할 때 흔히 그릇의 크기와 스케일을 논한다. 시도 그렇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와 통념적인 인식을 초월하여 넘나든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이 탁 트이고 시원시원한가. 아니 통쾌한가. 종이의 집만이 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한다. 눈송이, 물, 공기의 자연 삼라가 다 한몸으로 내통한다. 이 시는 무한광대한 영역을 철책없이, 그 소통의 황금 도포자락을 유유자적 펄럭인다. 이 시의 비의가 오래 뇌리에 박혀 한껏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박제천 시인은 서울 출생. 1965-66년 <현대문학>추천완료. [莊子詩] [心法] [律] [달은 즈믄 가람에] [어둠보다 멀리 [노자 시편] [너의 이름 나의 시] [푸른 별의 열두 가지 지옥에서] [나무 사리] [SF-교감]등, 다수 시집 및 시선집 등 번역서가 있다.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녹원문학상, 월탄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신지혜.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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