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4세 풍월주風月主 천광공天光公(11) |
보스톤코리아 2022-06-06, 11:38:46 |
숙부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희강왕 김제륭, 836년 제42대 흥덕왕이 후사없이세상을 뜨자, ‘주인없는’ 용상 쟁탈전이 숙질간에 일어났다. 숙부 김균정과 조카 김제륭이 그 주인공들이다. 제38대 원성왕은 798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아들을 셋 두었다. 장남 인겸(혜충태자)은 791년에 사망하였고, 차남 의영(헌평태자)도 794년에 사망하였다. 삼남은 김예영이다. 태자 인겸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죽었지만 아들이 넷 있었다. 그들이 김준옹, 김언승, 김수종, 김충공이다. 원성왕이 798년 사망하자, 그의 장손 김준옹이 소성왕으로 즉위하였다. 소성왕이 2년후 사망하자, 그의 장남 김청명이 만12세의 나이에 즉위하니 그가 제40대 애장왕이다. 809년 애장왕의 숙부 김언승이 동생 김수종과 당질 김제륭과 합세하여 애장왕과 그의 동생 김체명을 살해하였다. 그래서 김준옹(소성왕)의 후손은 절손되었다. 809년 정변의 주모자 김언승은 제41대 헌덕왕으로 즉위하였고, 그는 826년까지 왕위에 있었지만 차기 왕위는 아들에게 넘기지 못하고 동생인 김수종에게로 이어졌다. 김수종이 제42대 흥덕왕이다. 김언승(헌덕왕)은 아들이 있긴하였지만(당나라에 입조 및 출가), 그의 후손 또한 절손되었다. 흥덕왕이 836년까지 재임하였지만 그 역시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지 못했고, 그의 후손도 절손되었다(그의 아들 김능유는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었다). 이제 원성왕의 후손은 3남 김예영의 후손과 장남 인겸의 막내 아들인 김충공만 남았다. 김예영은 장남 헌정과 차남 균정이 있었고, 김헌정은 아들 제륭을 두었다. 그리고 김충공은 아들 김명이 있었다. 836년, 흥덕왕이 죽자, ‘주인없는’ 용상을 차지하려고 정변이 일어났다. 정변의 주인공은 숙부 김균정과 조카 김제륭이 지지자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대립하였다. 이 정변 가운데 김균정은 살해되었고, 그를 지지했던 김우징(김균정의 아들)과 김양 등은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훗날을 도모하였다. 정변에서 승리한 김제륭은 제43대 희강왕으로 즉위하였고(836년), 그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 김명金明은 상대등에, 이홍利弘은 시중에 올랐다. 희강왕이 왕좌에 앉아서 국정을 살펴볼 틈도 없이, 곧이어 궁중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김제륭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왕권을 차지하는데 일등공신으로 상대등과 시중에 임명된 김명과 이홍이 반란을 일으켜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희강왕은 동지였던 측근 신하들로 부터 버림받은 것을 알고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리고 김명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 44대 민애왕이다(838년). 당시 김명의 나이 21세였다. 김명은 원성왕의 장남 인겸의 4남인 김충공의 아들이다. 상대등보다는 왕을 더 탐내어 반란을 일으켜 많은 귀족들을 죽이고, 희강왕 김제륭을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게 하면서, 그 용상을 차지한 김명(민애왕)은 고작 12개월 가량 왕위에 있다가 약관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한편 836년, 김우징은 아버지 김균정을 도와 김제륭 일파에 대항하여 왕위쟁탈전에 가담했다가 아버지가 살해되면서,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목숨을 부지扶支하여 훗날을 도모하고자 청해진으로 피신했다.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에게 의탁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날만 고대하고 있었는데, 838년 1월 김명(민애왕)이 희강왕을 제거하고 왕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병사 지원을 요청하여, 막하의 장군 김양과 함께 동년 3월부터 무주武州에서 한 차례의 격전을 승리로 이끌고, 839년 정월 달벌達伐(현 대구)에 당도하였다. 민애왕은 김양의 군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흔, 윤린, 의훈 등의 장수들에게 병사를 주어 싸우게 하였지만, 결과는 대패하였다. 그러자 왕을 시위하고 있던 측근들은 모두 도망하였고, 민애왕은 홀로 나무 밑에 있다가 한 저택으로 피신하였지만, 곧 김양의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살해되었다(839년1월19일).384) 그리고 다음 왕으로 김우징이 즉위하였다. 그가 제45대 신무왕이다. 아버지 김균정을 도와 왕위쟁탈의 일전에서 실패하여 아버지가 살해되자, 훗날을 도모하기 위하여 청해진으로 피신하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고, 그로부터 많은 군사를 지원받아 아버지의 정적(정적의 우두머리 희강왕 김제륭은 이미 자살하였다) 김명(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신무왕 김우징은 즉위한 해 7월23일에 병사하였다. 그는 고작 181일간 왕위에 있었다. 신라 역사상 가장 짧게 재위한 왕이다(한편, 삼국유사에는 동년 11월23일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무왕 김우징은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하고 죽었지만, 다행히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 장남 김경응을 비롯하여 차남 김영광, 삼남 김흥광, 사남 김익광, 장녀 광화부인/부마 김계명, 차녀 계림군부인/부마 김경주을 두었다. 그리고 이복동생 김의정金誼靖도 있었다. 차기 왕은 장남 김경응이 제 46대 문성왕으로 즉위하였다(839년). 384) 민애왕은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의 아들 넷 중 막내인 김충공의 아들이었는데, 김우징/김양에게 살해되면서 김충공과 민애왕의 후손들도 절손되었다. 그후 제45대 신무왕 부터 제52대 효공왕까지의 왕들은 모두 원성왕의 3남 김예영의 후손들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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