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2세 풍월주風月主 양도공良圖公(17) |
보스톤코리아 2021-12-22, 15:48:27 |
“남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했다”. 이것은 김양도가 640년 풍월주의 위를 떠나면서 차기 자리를 김군관에게 물려 주면서 받은 비난이다. 유능한 상랑들을 제치고 김군관을 차기 풍월주로 선임하자 모든 상선(전임 풍월주)들이 반대하였다. 한편 김군관의 누이 명란明蘭은 일찍이 양도를 좋아하여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지만, 양도의 어머니 양명공주가 허락하지 않아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양도는 내키지 않았지만 양명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이부동모의 누이 보량과 결혼하였다. 이와 함께 명란은 양명의 또 다른 아들인 장명(아버지는 김염장이다)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양도는 명란을 잊지 못하였고 부제였던 김군관을 통하여 명란을 첩으로 삼았다. 그러자 상선과 화랑들은 모두 이에 대한 보상으로 김군관을 풍월주로 임명하였다며 비방하였다. 물론 김군관도 문충이나 선제, 천진과 하장 등의 화랑들에 못지 않은 출중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지만, 남(사실은 이부동모의 형)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그 첩의 동생인 김군관에게 풍월주를 물려 주었으니 선문仙門 내의 여론은 양도에 대한 비방으로 가득했다. 화랑세기에 기록된 그 내용을 보면, [처음에 양도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나 명란明蘭이 사통을 했는데, 양도공이 이미 보량을 아내로 맞이했기에 명란이 장명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이 공公만 하지 못하여 그 어머니를 원망했다. 석명昔明은 곧 양명의 이부형이었다. 군관은 이에 장명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公에게 돌아가게 했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하기를 “남의 부인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했다” 고 했다] 명란과 군관의 어머니인 석명昔明은 부모가 진지왕과 보명궁주이다. 또 후일 보명궁주는 미실과 함께 어린 진평왕의 좌우후左右后로 색도色道를 하는 과정에서 양명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양명이 설보종과 결혼하여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고, 동시에 모종과 사통하여 양도를 낳았다. 양도와 보량은 부부가 되었고, 명란은 양도의 첩이 되었다. 김양도와 김군관은 소시적에 함께 사신으로 당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들은 모두 문무를 겸비한 유능한 인재들이었다. 김춘추와 김유신 휘하의 장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문장과 외교술이 뛰어나 당나라에 사신으로 여러번 다녀왔다. 김양도는 여섯 번째 사행에서는 돌아오지 못하고 당나라에서 옥사하였다. 그는 나당전쟁의 해명을 위해 669년 김흠순과 함께 파견되었다가 당 고종高宗에 의해 하옥되었다. 이듬해 김흠순은 풀려서 귀국했지만, 김양도는 계속 억류되어 그 곳에서 옥사하였다(670년, 삼국사기 권6, 문무왕10년). 김군관 역시 문무를 겸비한 관리로 신라의 조정의 중추 역할을 해오다가 680년에는 상대등에 오르면서 병부령도 겸임했는데, 이듬해인 681년 김흠돌의 난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자결하였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동일하다). 비록 누나를 양도의 첩으로 들이고 풍월주를 이엇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김군관은 화랑의 수장이 될 풍채와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대한 평판과 아울러 김양도와 김군관의 앞날을 정확하게 점친 점쟁이의 일화가 화랑세기에 전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커다란 지략을 가지고 있어 위아래 사람을 다스릴 수 있었으니 공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明蘭에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이 했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서로 도왔다. 군관은 용기가 있어 전쟁을 잘했기에 공의 훈업 또한 군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다가 도중에 점쟁이를 만나, 점을 친 즉 말하기를 “두 공은 모두 장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 했다. 양도공이 웃으며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 말했다. 공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했다. 마침내 흠돌의 난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612년에 태어난 김군관은 비교적 장수하였지만, 점쟁이의 말대로 그만 비명횡사하였다. 양도의 죽음을 보고 정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는 흠돌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고, 동조했다는 기록도 없는데, 다만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흠돌의 난은 당시 많은 변혁을 가져왔다. 진골귀족세력의 정치에서 전제왕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난의 중심세력들이 풍월주 출신들이라 하여 화랑도에도 일대 변혁을 일으켜 풍월주제도가 폐지되었다(681년).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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