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원필경 (桂苑筆耕) 2 |
보스톤 전망대 |
보스톤코리아 2021-11-08, 11:15:26 |
황소의 난 결말(875~884) 황소는 880년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황제의 위에 올랐다. 황소는 그의 심복 주온을 출병시켜 관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려고 하였는데 커다란 변수가 생겼다. 주온이 당나라에 투항하여 형세가 역전되고 투르크계 사타족 출신인 이극용이 수도 장안을 탈환하여 형세를 역전시켰다. 그래도 황소는 4년동안 계속 대항했으나 하남성 일대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황소가 자결함으로 10년에 걸친 반란이 끝나게 되었다. 반면에 황소 토벌의 책임을 맡은 절도사 고병은 관할지인 양주에 계속 머무르면서도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있는 황소군에 대한 공격이 없었다. 그래서 고병은 반란의 의심을 받게되고 882년에 파직을 당해 독립 군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후일담이지만 고병은 모든 군무에서 손을 떼고 평소에 탐익해왔던 도교의 신선술에 몰두하여 측근 여용지(呂用之)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신선이 될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이에 부하 병마사 필사탁이 반란을 일으켜 고병을 제거한 것이다.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고병이 파직된 882년부터 884년간의 최치원이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882년은 황소의 난이 마무리 되는 때로 최치원은 당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게 된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를 말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치원에게 "토황소격문"으로 적을 무찔렀다고 무공훈장을 달아준 것이다. 최치원 돌아오다 최치원은 헌강왕 10년(884) 신라사신으로 회남에 왔던 김인규와 사촌동생 최서원으로부터 고국 신라의 소식을 전해 받게 된다. 최치원은 지금까지 자신을 돌보아 주던 고병 절도사가 파직을 당하고 죽은 이상 당나라에 있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29세때인 886년에 신라로 돌아온다. 17년만에 돌아온 것이다. 헌강왕은 그에게 시독겸, 한림학사, 병부시랑에 임명하였다. 시독은 국왕과의 경연을 주관하는 중요한 자리이고 한림학사는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는 당나라에서 온 생애를 걸쳐 심혈을 기울여 편찬한 계원필경 20권을 헌강왕에게 바치고 귀국한 즉시 왕명으로 대승복사비문의 명문을 남겼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그 이듬해에 헌강왕(886)이 사망하고 정강왕이 즉위했으나 그 역시 1년후에 사망하여 진성여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귀국초기에 최치원은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계의 한계와 국정이 문란함을 깨닫고는 외직을 자원해서 890년에 대산군(전북 태인), 천령군(함양), 부성군(서산) 등지의 태수가 되었다. 천령군 태수로 있을때는 읍성을 흐르던 위천수가 범람하자 강뚝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지리산의 나무를 심어 지금까지 이어오는 상림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부성군(서산) 태수로 있던 893년에는 당나라로 가는 사신으로 내정되었지만 도둑들이 들끌어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전성 여왕 연간에 신라사회는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889년 진성여왕 3년에 주, 군에서 세금 납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원종과 애노의 난이라고 부른다. 반란이 어떤 식으로 결판이 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진압은 되었지만 이 반란의 후폭풍은 신라를 패망의 길로 재촉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제는 온 나라가 내란에 돌입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이미 당나라에서 10여년 동안 황소의 난을 체험한바 있었다. 895년 내란의 와중에서 해인사 경내에 공양탑을 세울 때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벌어졌던 재앙이 서쪽 당나라에서는 멈추었는데 동쪽 신라로 옮겨와 굶어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해인사에 있었던 공양탑은 길상탑(吉祥塔)이라고 부르는데 오랜 내란으로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해인사 스님이 895년에 건립한 위령탑이었다. 탑은 해인사 경내에 보전되어 있지만 1966년 탑 안에서 탑지 4매와 석탑 공양물이 나왔는데 4매의 탑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 선생이 작성한 것으로 현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치원은 894년 시무책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하였다. 10여년동안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거치면서 귀족들의 부패와 사회모순을 목격한 결과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다.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한 왕권강화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시무책은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지고 최치원은 6두품으로는 최고 관등인 아찬에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정작 개혁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진골 귀족들이 즉각 반발하여 시무 십여조는 불발로 끝나버린다. 이에 진성여왕은 도적들이 봉기하는 것은 자신이 부덕한 소치라고 과실을 인정하고 진성여왕 11년(897)에 조카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진성여왕은 양위한지 반년만에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는 진성여왕이 자신의 삼촌인 각간 위홍과 좋아 지내더니 항상 궁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신라에는 삼촌과 조카딸이 서로 사랑을 할 수 있었다. 위홍과 대구화상이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수집했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진성여왕에 이어 최치원도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1세의 장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해인사로 은거를 한다. 자신의 친형인 현준 스님이 해인사의 승려였기 때문이었다. 은퇴 후에 전국을 유람했는데 경주 남산, 합천의 빙산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부산 해운대, 창원 월영대 등에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최치원은 자신의 호인 해운을 동백섬 바위에 새겨 그것이 지금까지 지명으로 이어져 해운대란 지명이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신라사람으로는 설총과 함께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는 일부만 기록하면 계원필경, 쌍녀분, 제왕연대력, 김수로왕의 신화를 기록한 석이정전, 석순응정 등이 있다. 불교 승려들과 관련된 서적을 많이 구독하고 집필한 이유는 불교수업을 호국의 수단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후학들에게 "집에 들어와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었고, 자연 그대로 행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한 짓을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교화"라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이지만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말년에 후학을 지도하면서 학사제 앞에 지팡이를 꽂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지팡이도 살 것이니 학문에 열심히 하라는 말과 함께 갓과 집신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내용만 전한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계림은 시들어 가는 누런 잎이요, 개경은 푸른 숲이라는 구절이 있어 그는 이미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김은한 보스톤코리아 컬럼니스트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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