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花郞徒)와 성(性) 그리고 태권도(跆拳道) |
화랑세기花郞世紀, 22세 풍월주風月主 양도공良圖公(3) |
보스톤코리아 2021-09-20, 11:20:37 |
– 설보종薛寶宗, 보종은 미실이 경험한 남자 중에서 가장 사랑했다는 설화랑과 함께 낳은 아들이다. 미실이 말년에 영흥사永興寺에서 기거할 때 ‘이상한 병奇疾’ 에 걸려 몇 달 동안이나 회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설화랑은 주야로 미실의 옆에서 간병하면서 자신이 그 병을 대신 앓기를 기도했다. 마침내 미실은 회복되었고 설화랑은 같은 병을 얻어 앓다가 죽었다(아마 그들은 전염병에 감염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나이 58세 였다(606년). 미실은 자신이 늙을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들어준 정인 설화랑의 마지막 가는길에 자신의 속곳을 함께 넣어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다. 16세 풍월주를 지낸 보종공, 그는 채식가였고, 정원의 수석과 고목을 즐기면서, 물고기와 학을 길러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연속에서 신선처럼 살았다. 그는 혼기가 가다와도 도무지 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염려한 미실이 윤궁允宮352) 의 딸 현강玄剛과 보종을 혼인시키려고 현강을 데려왔지만 보종은 그녀와 단 하룻밤도 동침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종은 김호림(14세 풍월주)을 불러 같이 살았다. 이에 곧 호림과 현강은 상통하여 딸 계림이 태어났고 그들은 혼인하였다. 한편 설보종은 계속 신선처럼 혼자 살았다. 애가 타는 어머니 미실은 종실의 혼인 적령기의 여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보종과 친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많은 여자들이 보종을 즐겁게 해주려 했으나 아무도 이루지 못했다. 이윽고 양명공주가 꾀를 내서 보종을 유혹하였고 결국 그들은 상통하였다. 뒤늦게 여색을 안 보종은 딸 보라寶羅와 보량寶良을 낳았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거기 까지였고 보종은 색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후 양명공주는 김염장(17세 풍월주, 설보종이 16세 풍월주를 역임할 때는 부제를 지냈다) 과 사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한편 보종은 조카인 모종을 자신처럼 사랑했기에 총명한 그를 아끼면서 문장과 그림을 가르쳤는데 양명도 함께 배웠다. 이런 과정에서 보종은 아내 양명이 연하이기는 하지만 모종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래서 양명이 길조의 태몽을 꾸었다며 남편 보종과 동침을 원할 때 코를 골며 돌아 누었고, 같이 있던 모종에게 ‘유혹당할’ 기회를 주었다. 그로 인해 610년 김양도가 태어났다. 화랑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 가서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보종공이 내사內事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곧 하종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럼 사랑했다.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鸞의 상서로움을 얻고 길조吉兆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 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 하고는 반드시 누워 자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옆에서 묵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럽혀졌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하여 공을 낳았다. 대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를 발로 차서 사랑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다섯 살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랑하여 아우님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고 이름 지으며 말하기를 “그림은 아우님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했다. 공주가 기뻐 그 이름을 허락했다.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했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대답할 것이 없어 숨겨서 말하기를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지은 것이다” 했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했다. 따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했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부여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오랫동안 ‘당평제비’로 불렸다. 이 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그렇게 불려왔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 중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 란 명문이 적힌 기와를 발굴하였다. 그래서 태평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이미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한 결과 사찰이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을 알았고, 2008~2010년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절터 전체를 발굴하면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결과는 오층석탑을 포함한 정림사는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였으며, 백제 왕실이나 국가의 상징적인 사찰로 판단하고 있다. 즉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소정방이 승전 기념으로 새운 것이 아니라 이미 사비성에 존재했던 국가의 상징적인 사찰 석탑에 전승 기념문(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을 새겼던 것이다. 이 비문에 우무위중랑장右武衛中郞將 김양도金良圖 라고 양도의 관등성명이 새겨져 있다. 나당연합군의 장군으로 그가 세운 전공을 미루어 짐작해본다. 352) 윤궁은 거칠부 황종의 딸이며, 8세 풍월주 문노의 부인이다. 윤궁은 처음에 동륜태자를 섬겨 딸 윤실공주를 낳았고, 동륜이 572년 죽자 과부로 살면서 진종(지증왕의 아들)과 정인 관계에 있었다. 그러다가 577년 세종과 미실의 권유로 골품이 낮은 문노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3남(대강, 충강, 금강) 3녀(윤강, 현간, 신강)를 낳았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 신라인 그들의 이야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소나무), 화랑세기 – 또 하나의 신라(김태식, 김영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박선우 (박선우태권도장 관장) ⓒ 보스톤코리아(http://www.boston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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